집과 기관원 (10회)
  제3장 우리 모두 감시받고 살았다

나는 지금 방배동에 살고 있다. 내가 이곳에 살게 된 것은 나를 감시하고 따라다니던 기관원 덕분이다. 나를 따라다니던 기관원들은 경찰, 형사, 보안사, 중앙정보부(나중에 안기부) 든 다양했다. 그들은 내가 집을 사고 팔 때 마다 트집을 잡으려고 꽤 노력했으나 매번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그들 때문에 시달리고 불편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대학을 다닐 때 학비조달을 위해 거의 1년마다 집을 사고 팔고 사는 일을 반복했다. 오식형님이 해준 쌀 110가마의 밑천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학생신분으로 결혼을 한 터라 생활비는 교사인 아내가 감당했다. 그러나 당시 교사월급으로는 내 등록금까지 대기가 힘들었다. 가장으로서 생활비를 아내에게 감당하게 하는 것도 영 마음에 쓰이는데, 학비까지 부탁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집이 있긴 했으나 그것은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사고파는 용도였기 때문에 우리는 늘 전셋집에 살았다. 1968년 마지막으로 집을 팔아 이제는 집을 지어볼 생각으로 수유리에 있는 번동교회 뒤편에 대지를 구입했다. 그런데 김신조 사건이 터지면서 수유리 지역의 집값이 폭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내가 구입한 대지 위에 군에서 토치카(tochka)를 파는 바람에 건축허가마저 곤란하게 되었다. 결국 나는 헐값에 그 대지를 팔아버렸다. 그러다가 1972년 1월, 필리핀 에큐메니컬 조직인 페코(Phillppines Ecumencial Committee for Community Organization, PECCO)에서 주민조직(Communication Organization, CO) 훈련을 담당하고 있는 허버트 화이트(Herbert White)목사의 초대로 필리핀 톤도 지역에 연수를 가게 되었다. 

마침 전셋집 만기도 돌아오고 해서 필리핀으로 가기 전에 새로 살 전셋집을 마련해놓고 떠날 요량으로 집을 보러 다녔다. 다행히 부동산에서 한 집주인과 전세 흥정을 잘해주어 계약을 하기로 했다. 며칠 뒤 전세금을 가지고 다시 집주인을 만났다. 그런데 집주인의 인상이 좀 달라 보였다. 부동산업자도 표정이 이상했다. 젊은 집주인이 내게 물었다. 

“아니가 몇이지요?”
“둘입니다.”
“아이가 둘이어서 안 되겠습니다.”

계약 직전에 갑자기 집주인이 아이가 둘이라는 이유로 거절을 했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아이가 둘이라면 전세도 못 얻는 세상이 되었단 말인가. 저 사람은 지금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변명을 하고 있는 걸까?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달리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설득한 뾰족한 수도 없었다. 
 
서글픈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나는 앞집에 사는 고향 어르신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그는 내게 가진 돈이 얼마냐고 묻더니 그 돈으로 땅을 구입하면 집을 지어주겠다고 했다. 그는 집을 짓는 목수였다. 

나는 성북구 월계동에 있는 작은 채전밭 두 두둑을 20만원에 구입했다. 그곳은 앞뒤로 묘지가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 13평짜리 집을 지었는데, 전부 40만원 가량의 돈이 들었다. 그 돈은 집을 짓기 위해 샀다가 헐값으로 팔아버린 수유리 대지값과 그동안 아내가 모아 놓은 돈을 합친 것으로, 우리집 전재산이었다.
 
언덕에 있는 외딴집인데다가 묘지와 묘지 사이에 위치해 있었지만, 처음으로 갖는 ‘우리집’이어서 그런지 정이 갔다. 딸아이와 아내는 개울을 건너고 논둑과 밭둑을 지나 먼 곳에 있는 학교와 직장을 걸어 다녀야 했다. 그래도 집이 마련된 덕에 나는 마음 놓고 필리핀으로 떠났고, 3개월 가량의 연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필리핀에서 돌아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다니던 골목에 갑자기 보도 볼록이 세워져 다니지 못하게 됐다. 그래서 우리는 집에서 5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세탁소 뒤편 골목으로 드나들었다. 그 세탁소를 나를 담당하는 형사가 늘 웅크려 앉아 있던 곳이기도 했다. 

▲ 필리핀 톤도에서 만난 비톡(동네주민), 리프노(지역리더), 리빙 신부 등과

사실 우리가 다닐 수 있는 길이 그곳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집 주변은 사방이 열린공간이라 얼마든지 다른 논길, 밭길로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집 앞에 있는 묘지의 주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묘지를 이장할테니 두말하지 말고 그 땅을 사라는 것이었다. 묘지 주인은 뒤늦게 상황을 알고 팔리지 않던 묘지터를 내게 팔아넘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 후 여러 차례 전화가 왔지만, 나는 그 길이 아니어도 다닐 길이 여럿 있고, 또 돈도 없고 해서 그냥 무시해버렸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세탁소주인이 시비를 걸어왔다. 왜 자기집 뒤편으로 다니냐는 것이었다. 나는 웃으면서 “그 땅이 당신 땅이요?” 하고 되물었다. 그런데 자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길래 화를 좀 냈다. 그랬더니 자기도 좀 난처하다면서 우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닌가. 

그제서야 퍼뜩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미아리 삼거리 집에 계약을 하러 갔다가 막판에 퇴짜를 맞은 일, 묘지 주인이 다짜고짜 땅을 사라고 한일, 또 세탁소 주인이 난처하다고 했던 말들이 떠오르면서 이 모든 일이 기관원의 작당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내가 집을 이사할 때마다 괴롭히는 ‘그자’가 도대체 어디 소속일까 하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나는 이번에 경찰서 유치장이 아니라 남산 부활절연합예배사건으로 감옥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하루는 아내가 면회를 와서 우리 집을 100만원에 팔고 미아리삼거리에 있는 새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면서 좋아 하길래 그 일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이처럼 전셋집도 마음대로 얻지 못하고, 허허벌판에 합법적으로 지은 집에서조차 마음 편히 살지 못하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니었다. 1977년 성북구 미아리에서 잘 살다가 이후 서초구 방배동으로 이사를 가게 된 것도 중앙정보부 기관원 때문이다. 

교사인 아내는 일정 기간이 되면 관내의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야 했다. 그런데 전근을 앞둔 1976년 말쯤에 중앙정보부의 이모과장이란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제 사모님 전근을 가셔야 할 때이지요?”

나는 “왜 그것을 당신이 물어?”하고 끊어버렸다. 또 전화가 걸려 오길래 “이제 당신들이 교육부가 하는 일까지 맡아서 하는 거야?”라고 하면서 다시 끊어버렸다. 
 
그동안 그들은 나에게 자꾸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그때마다 내가 별 호응을 하지 않자 수작을 부리는 것이었다. 아내를 좋은 곳으로 전근시켜 줄 테니 만나달라는 것이다. 회유와 협박을 적절히 섞는 것은 그들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나는 좀 오랫동안 밖에서 지내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나를 본 아내는 성북구 관내에 발령이 나는 게 정상인데, 봉천동 꼭대기에 있는 학교로 발령이 났다며 난감해 했다. 당시 교통편으로는 미아리에서 봉천동까지 다니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그리 발령이 났다면, 필시 그것은 나 때문이었다. 이제는 아내의 인사까지 좌지우지 한다는 생각이 들자 걱정도 되고, 한편으로는 괘씸하기도 했다. 여러 짐작되는 일이 있기는 했지만 아내에게는 아무 내색도 할 수 없었다. 

다음날 사무실에 가자마자 나는 중앙정보부에 전화를 걸었다. 마침 내 책상에는 중앙정보부 서울지역 책임자인 방 모 준장의 명함이 있었다. 그 명함은 동대문감리교회 장기천 감독이 준 것이었다. 장 감독은 내게 명함을 건네며 “이 사람은 내가 군목으로 있을 때 알던 사람인데, 당신 좀 만나게 해달라고 하네. 그런데 당신이 만날 시간도 없을 것 같고 해서 거절했는데 혹시 연락할 일이 있으면 하게.”라고 말했다. 

그가 전화를 받자 나는 다짜고짜 “언젠가 귀 기관에서 이 모 과장이 전화를 걸어 ‘사모님 인사가 있는 해이지요?’ 라고 말해서 중앙정보부에서 교사들 인사문제까지 관여하느냐고 말하고 전화를 끊은 적이 있는데, 어떻게 성북구 교사가 봉천동으로 발령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고 항의 했다. 

그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화가 나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2~3일 후에 집에 들어갔더니 아내가 나를 불러 앉히고 말했다. 

“오늘 발령 받은 봉천동 학교에 갔거든. 그런데 교감선생님이 내 발령장이 잘못되었다고 다른 발령장을 주면서 ‘방배초등학교로 가세요’ 하던데요.”

“그래?”
“그래서 오늘 방배초등학교에 가서 신고하고 왔어요.”
“그거 잘됐네. 이제 그리로 이사를 가야겠구나.”

아내의 눈치를 보니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그래서 미아리 대지극장 뒤편에 있는 넓은 집을 팔고 방배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강남에서는 도무지 그 돈으로 살만한 집이 없었다. 1977년 봄. 이미 강남은 강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집값이 뛰어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많은 은행 빚을 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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