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사정과 나와의 관계 (75회)
  제12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2

남북인간띠잇기는 통일에 대한 단순한 열망뿐만 아니라 통일을 바라는 사람들의 구체적 실천과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통일을 향해 모든 국민이 할 수 있는 행동과 실천을 해나가면 언젠가는 민족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질 것이라고 믿게 되는 행사였다. 

남북인간띠잇기 대회는 예상외로 여러 곳에서 많은 지원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700만 원 정도의 부채를 져야 했다. 나로서는 이 돈을 갚기 위해 고민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생각난 사람이 기독학생운동 선배인 김정문 알로에 회장이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그에게 조심스럽게 이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는 한참동안 나를 응시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 돈을 내가 주겠소.”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정문 회장은 현금으로 일시에 이 빚을 갚아주었다. 

KNCC에 있는 5년 동안 여러 일들이 있었다. 내가 KNCC 총무로 오자마자 T교단 어르신들이 나를 검증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교단 총무가 정확한 이유는 말하지 않고 머뭇거리는데,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언론을 통해 나의 부정적 유언비어가 많이 유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회원 교단 어르신들에게 인사도 드릴 겸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었다. 내 예상대로 이 만남은 청문회 비슷한 간담회로 잘 끝났다. 

KNCC에 처음 출근하던 날, 어느 연합단체에서 일한다는 장로 한분이 찾아와서 용공 운운하며 나는 공격하고 KNCC를 공격한 일도 있었다. 별일 아닌 듯싶어도 크게 보면 교회 내부에서 빚어지는 일이라 걱정이 되었다. 어쩌다가 한국교회가 이렇게 되었을까?

KNCC는 우리 교회가 서야 할 자리,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오랜 독재정권 치하에서 한국교회와 함께 민주화운동, 인권운동, 평화통일운동을 해왔다. KNCC는 휴전선 한복판에 선 입장에서 성경 말씀에 따라 민족의 평화통일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런데 KNCC가 성경에 근거해어 백성들과 함께 하려고 하면 할수록 독재정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욱 억압해왔다. 그들은 우리를 억압하고, 이간질하고, 분열시키기 위해 KNCC와 비슷한 도구를 필요로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박정희 정권에서는 ‘한국지도자협의회(한교협)’였고, 전두환 정권에서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이다. 당국은 이 조직을 내세워 이슈가 있을 때마다 교회를 분열시키고 억압했다. 창립초기에는 한기총을 이용해 마치 한국교회가 노태우 정권 창출에 앞장선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한기총을 조직하는 데 필요한 재정모금은 예장합동과 예장 통합의 두 기업인을 통해 이루어졌다. 여기에 한국교회의 어른인 한경직 목사를 창립위원장으로 내세웠다. 그리하여 ‘이제는 한국교회가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라는 명분을 내세워 1988년 12월, 36개 교단이 참여한 가운데 출범했다. 

권1.jpg
 
 
▲ 上 - 남묵인간띠잇기대회는 총 6만4천5백여명이 참가했다. / 下 - 남북인간띠잇기대회에서 폐회사를 하고 있다

사무총장으로는 과거 한 언론사를 폐쇄시키는데 공헌한 고신 교단의 김경래 장로를 내세웠다. 군사정권과 보수 기독교 세력의 상호 필요에 의해 탄생한 한기총은 한때 KNCC와 더불어 한국교회 대표연합기관으로 자리매김했으나 시간이 가고,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등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몰락하기 시작했다. 

최근 연동교회(통합) 원로 목사인 김형태 목사는 젊은 목회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기총이라는 조직은 있어서는 안 될 조직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그 수명이 다해 간다고 하니 이제 해체되어야 한다.”라는 취지의 말을 하여 많은 지지를 받기도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출근 전날 나를 찾아온 용공 운운한 장로는 한기총 실무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KNCC는 온갖 수난을 겪으면서도 5.18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민족분단의 벽을 허무는데, 더욱 더 노력을 기울였다. 왜냐하면 민족의 평화통일이 이루어져야만 진정한 민주화가 이룩되고, 인권이 보장되며, 이 민족의 미래가 열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88년 온갖 비방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마침내 WCC와 함께 남북교회가 평화통일선언과 1995년 희년을 선포하게 된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KNCC는 WCC의 JPIC대회를 수용하여 이것을 집행했고, 자체적으로 공산권 성경찬송보내기운동을 통해 중국교회, 러시아정교회와의 관계도 돈독히 했다. 마침내는 방북을 성사시키고, 북한교회 지도자들을 초청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그리고 휴전선 한복판 판문점에서 남북교회 지도자들이 마주 앉아 북한교회 지도자들의 한국방문 문제를 놓고 협의를 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남북교회가 정기적으로 상호 방문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듯했다. 희년을 향한 행진은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KNCC 주변의 모든 그룹이 희년을 향한 프로그램을 집행했고, 특히 여성위원회는 이 희년운동에 총회를 기울였다. 이때 신선, 이예자 국장이 참 많이 수고했다. 

KNCC는 남북교회 간 교류의 좌절을 겪으면서도 남북인간띠잇기 대회와 남북나눔운동 등을 계속 진행했다. 인간띠잇기 대회의 경우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우리와 함께 했다. 1995년 희년을 향한 행진도 국민들에게 많은 호응을 받았다. 

그런데 나는 이 희년을 1년 남짓 남겨놓고 1994년 2월, 갑작스럽게 KNCC를 떠나게 되었다. 

1994년 초 어느 날, CBS 사장을 지낸 김관석 목사(기장)가 점심이나 같이 하자며 나를 불렀다. 가끔 점심을 하자고 연락을 해오던 터라 그날도 별다른 생각 없이 점심식사 자리에 나갔다. 식사를 하는 동안 김 목사는 “CBS 표용은 이사님이 무슨 말씀 없었어?”라고 물었다. 

나는 표 이사에게서 특별한 연락을 받지 못한데다가 김 목사의 말투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네,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별로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표용은 이사가 급히 나를 보자며 연락을 해왔다. 그 자리에서 그간 있었던, CBS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표 이사는 어려운 상황에 처한 CBS 사정을 언급하며 “사장이 (자리를 지키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그러니 KNCC 총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 CBS가 KNCC의 산하 조직이니 KNCC 총무인 내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CBS 사장을 맡아보라는 뜻을 내비쳤다. 

뜻밖의 말을 들은 나는 ‘여기에는 정부와 무슨 정치적 문제가 있는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장의 사표는 받으면 안 됩니다. 그 일에는 정치적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럴 경우 사표를 받으면 CBS가 더더욱 곤란해집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에도, 문민정부에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KNCC 때문에 움직일 수 없습니다.”라고 답하고 헤어졌다.

 
  판문점에서 임진각까지_남북인간띠잇기 대회 (74회)
  KNCC를 따나 CBS 사장으로 (76회)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