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교회에만 의존하는 재정문제 해결 (60회)
  제11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1

해외 교회에만 의존하는 재정문제 해결

산재한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가고 있는 동안에도 늘 내 발목을 잡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KNCC의 고질적인 문제인 재정문제였다. 그동안 KNCC는 재정의 대부분을 해외 교회에 의존해오고 있었다. KNCC를 불손한 과격단체 내지 용공단체로 몰아붙이는 정부당국의 홍보와 공격 때문이었다. 

KNCC는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에 선포될 수 있도록 불의한 체제에 맞서 온몸으로 항거해온 교회선교기관이었다. 그러나 독재정권은 KNCC에 대해 중상모략을 일삼았고, 한국교회를 분열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한 술책으로 인해 KNCC는 한국교회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지 못했으며, 재정적 지원도 받지 못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재정을 살펴보니 초창기에 결정한 각 교단 의무 지원금이 계속 현상 유지되고 있었다. 그동안의 물가상승과 당해 연도 경제상승 수치에 비교하여 매년 인상을 해야 했는데도 지난 수십년간 단 한 번도 인상을 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취임과 동시에 그동안 KNCC를 도와준 해외교회, 그리고 각 원조기관들과 협의를 통해 KNCC 재정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아예 그동안 KNCC를 지원해온 해외 교회들과 해외 외원기관들을 덴마크의 한 수도원으로 초청하였다. 이른바 KNCC 지원을 위한 ‘라운드 테이블 회의’를 실시한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 나는 먼저 한국의 경제성장 수치를 생각하고 한국 교회의 부흥을 고려할 때 우리 스스로 서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대단히 죄송하다는 말로 포문을 열었다. 물론 그 이유는 한국의 독재정권이 한국교회를 탄압했기 때문이라고 밝히며, KNCC가 기독교의 본래적 책임을 다 하려고 민주화와 인권에 관한 활동을 하다 보니 결국 독재정권과 갈등구조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의 독재정권이 KNCC를 억압하고 용공단체로까지 몰아붙인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정부는 WCC를 용공화 하는 것까지도 주저하지 않고 있다며 그동안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나서 KNCC도 스스로 회원교단과 협의하여 최단 시일 내에 재정자립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으나, 지금까지 지원해주었듯이 계속 지원을 바란다는 부탁을 했다. 그런데 이런 부탁을 하면서 수치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날 열린 라운드 테이블 회의는 WCC의 박경서 박사와 한국에서 같이 간 박종화 교수 덕분에 잘 마칠 수 있었고, 우리가 원한 계속 지원이라는 목표도 달성할 수 있었다 .

그러나 나는 KNCC가 지원요청을 위해 해외 교회와 기관을 향해 라운드 테이블 회의를 주재하는 일은 다시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국교회의 규모나 내용을 볼 때 한국교회 스스로 재정문제를 해결해나가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당장 시급한 불은 꺼야했기에 창피함을 무릅쓰고 라운드 테이블 회의를 통해 지원요청을 한 것이다. 

이 회의 이후 KNCC는 <재정자립대책위원회>를 가동하였다. 먼저 관계기관의 허락을 받아 KNCC의 기본재산을 기독교회관에 투자했다. 또한 1993년 말에는 <재정자립대책연구위원회>를 구성하여 각 교단의 회비를 약 300% 올리는 안을 실행위원회에 제안하여 결의했다.
 
▲ 1993년 한독기독교교회협의 (독일 베를린 근교 Bad Saasarow에서)

이 결의과정에서 모든 KNCC 실행위원들이 긍정적으로 협력해주었다. 특히 예장통합과 감리교단의 실행위원 일부는 교단 내부의 의견 조율 등을 위해 지도력을 발휘해주었다. 이에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그들은 에큐매니컬 운동에 큰 기여를 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KNCC는 1994년부터 직원들의 인건비와 경상비를 교단의 회비로 충당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세계 각 나라 교회 협의회 가운데 한국처럼 각 교단 회비로 인건비와 경상비를 충당하는 나라는 거의 없을 것이다. 현재 각 나라의 에큐매니컬 운동은 재정적 어려움에 처해있다. 특히 세계 에큐매니컬 운동단체들은 외원기관이나 선임자들의 과거 유산에 의존해오다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이처럼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에큐매니컬 운동기관들이 각 회원기관들의 회비로 운영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화통일을 향한 꾸준한 발걸음

KNCC가 집중해야 할 또 다른 당면과제는 평화통일 문제였다. 나는 KNCC가 추구하는 민주화와 평화통일에 대한 뿌리가 1970년대의 민중신학에 근거한다고 생각했다. 이와 관련 1981년 6월 8알부터 10일까지 서울아카데미하우스에서 제4차 한독교회협의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협의회에 건의에 따라 KNCC 내에 분단된 한반도의 통일문제를 연구해나갈 <통일문제연구원>이 탄생하게 되었다. 

KNCC는 1982년 2월에 열린 제31차 총회에서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 설치를 결의하고, 같은 해 6월 29일 정기 실행위원회를 거쳐 1982년 9월 16일 위원회를 정식 조직했다. 

그 후 KNCC는 통일문제연구원을 통해 한반도 평화통일협의회를 수차례 계획하였다. 그렇지만 실천단계에서당시 전두환 정권의 온갖 방해공작과 저지로 인하여 번번이 무산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NCC는 통일을 향한 열망을 놓지 않았다. 방해하면 할수록 더 집요하게, 더 긴 호흡으로 평화통일로 가기위한 반석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1983년 7월 15일부터 17일까지 열린 한미교회협의회를 통해 한반도의 분단은 미국과 관련이 있으며, 미국에 그 책임이 있다는 선언을 이끌어냈다. 

1984년 10월에는 WCC 국제위원회 주관으로 일본의 도산소에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정의에 관한 협의회’가 개최되었다. 이 협의회는 아시아, 중동, 유럽, 북미지역 등 20개국에서 65명의 교회지도자가 참석했는데, 안타깝게도 북한 교회는 자료만 보내고 참석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KNCC는 통일을 향한 행보를 멈추지 않았고, 그 결과 1986년 드디어 남북교회가 처음으로 만나는 역사적 경험을 이루었다. WCC의 주선으로 스위스 글리온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남북교회의 만남이 성사된 것이다. 

역사적인 이 만남으로 비로소 한반도 평화통일협의회가 개최될 수 있었다. 한반도평화통일협의회에서는 죄책 고백과 함께 화해를 위한 상식적인 성찬예식도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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