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CC 총무 취임 (58회)

실제로 이날 열린 실행위원회에서는 김상근 목사는 만장일치로 추대하자는 안과 김상근 목사를 추대하지 않을 경우 기장 측이 내놓는 후보를 조건 없이 수락하는 안, 그리고 투표를 통해 새롭게 총무를 선출하자는 안이 검토되었다고 한다.

토론 결과 기장 측에서 추천하는 후보를 조건 없이 수락하는 안이 채택되었고, 정회 후 속개된 회의에서 김상근 목사가 나를 추천했다. 김상근 목사는 많은 고민 끝에 이와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KNCC가 역사적으로, 또 선교적으로 해야 할 과제를 충실히 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서였으리라.

다음날 나는 홍콩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 제서야 내게 주어진 현실이 자각됐다. 비행기를 타고가는 내내 이런저런 걱정이 몰려왔다. ‘CCA에는 뭐라고 말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에서부터 ‘비상사태인 KNCC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가? 내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까지 수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와 어떤 생각도 정리하지 못한 채 홍콩에 도착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나의 선임자인 나이난이 CCA 부총무로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나이난에게 KNCC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설명을 들은 후에 그는 나에게 “그렇다면 KNCC를 위해 가야한다.”라고 확신을 주었다. 그러면서 “CCA-URM의 후임자는 누가 가장 좋겠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미국에 있는 안재웅 선생을 떠올렸다. 나는 안 선생이 가장 적임자라며 추천했다. 그리고 KNCC 총회는 2월에 열리니 인수인계를 위해 길게는 5월말까지 홍콩과 서울로 왔다갔다 하겠다고 말했다. 나이난은 부총무로서 최선을 다해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실제로 필요한 절차가 속히 마무리되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몇 번이나 나이난 부총무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 내가 받은 선물은 내용도 가관인 신문이었다. 신문에서는 KNCC 총무에 관한 온갖 추측성 기사들이 난무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긴 했다. KNCC 총무를 선임해놓고 1년여 동안 미루다가 엉뚱한 사람을 뽑았으니 말이다.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거의 6개월 동안 홍콩과 서울을 오가며 바쁘게 보내야 했다.

또 다시 돌아온 ‘종로5가’

종로 5가는 내 모든 것이 묻어 있는 제2의 고향 곳이다. 나는 종로5가의 그늘 아래에서 다시 태어났고, 이곳을 발판으로 젊은 날을 보냈다. 종로5가는 막연히 지리적 위치를 가리키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수많은 동지와 선배들이 반독재, 반민주에 맞서 투쟁한 빛나는 활약과 기쁨이 있는 곳이었다.

또 군사정부의 탄압 아래에서도 옳다고 여기는 신념과 결국에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따뜻한 연대를 잃지 않던 곳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쁨과 슬픔, 좌절과 고통을 나누며 눈물을 흘린 곳이었다. 나는 그곳을 비빌 언덕삼아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온 내 경험과 신앙동지들의 지혜를 후배들에게 물려주어야 했다.

그렇지만 다시 돌아온 종로5가는 안개 속에 쌓인 듯 했다. 갈등과 분열로 생긴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전선(戰線)은 싸워야 할 대상이 명료했던 지난날보다 훨씬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나의 발걸음은 무겁고 처연했다. 종로5가를 떠돌며 느낀 기쁨과 정다움의 추억은 잠시였다. 내가 아무리 스스로를 위안하려고 해도 그 느낌은 속일 수가 없었다.

▲ 1989년 KNCC 총무 취임을 마치고, 직원들과

종로5가의 상징인 KNCC는 오랜 진통을 겪은 후에 나를 선임총무로 선출했다. 내가 총무로 선출된 것을 두고 여러 잡음이 들리기도 했다. 내가 김상근 목사보다 더 강성이라는 탄식도 들렸다. 언론에서도 다양한 견해와 논조가 쏟아져 나왔다.

당시 나온 신문기사나 사설의 제목을 보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고민, 보ㆍ혁 갈등” “교단 간 이해관계 얽혀 난항 거듭” “총무선출 이후 3개 교단의 속사정과 움직임” 등과 같이 KNCC의 총무선출 과정을 진단한 것에서부터 “새로 태어나는 진통을” "급변시대, 능동의 대처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바란다“ 등과 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KNCC를 맡게 된 신임 총무에게 바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나는 여러 반응을 모두 확인하면서 KNCC 선배들이 보여준 비전과 내 몸에 밴 에큐메니컬 운동 본연의 임무를 겸손하게 수렴하여 묵묵하게 실천해가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언과 부탁, 우려까지 모두 귀담아 듣고 수렴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1989년 2월 10일 기독교회관 2층에서 총무 취임예배가 열렸다. 나는 이날 취임사에서 제13대 KNCC 총무로 단상에 올라 떨리는 마음으로 취임사를 했다.

사랑하는 자매형제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자리가 있도록 성령께서 역사해주심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며 또한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화답해오시고 실천해 오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오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교회는 살아계셔서 역사해 오시는 그리스도의 한 몸 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지어내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는 자들의 한 공동체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공동체는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과 삶을 함께 할 때만이 그 가치가 주어집니다.

바울 사도는 이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달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렇다고 설명해주고 있습니다.(고전 12:12) 우리는 성서적으로 다양성 속에 일치를 강력히 추구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 성령도 하나, 주님도 한분,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 하나님도 한분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마땅히 하나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는 근 100년동안 한국교회는 그 갈라짐의 원인이 근본적으로 교회 내적 요인보다 외적 요인이 적지 않았습니다. 즉 그것은 국내외적인 여러 악령에 의해서 분열과 배타주의의 악몽에 시달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미ㆍ소 등 강대국의 한반도 분단정책에 의해서 신앙적으로,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많은 불신과 갈등, 그리고 분열의 동기와 근거를 안게 되었고, 그 조짐은 지금도 상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더욱 더 아프게 하는 것은 타율적인 권력의 횡포로 우리의 불신이 조성되고 교회의 분열이 조직되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이와 같은 불신과 갈등, 분열의 조짐이 있을 때마다 성령의 역사하심과 우리 민족의 성숙한 신앙적 행위로 인하여 그 결정적인 위기를 극복해오고 있습니다. 어떠한 악령도 그것이 제국주의 악령이든, 그것이 민족의 허리를 꺾는 분단의 악령이든, 사상과 이념의 차이이든, 특수계층의 권력의 횡포이든지 간에 아직은 우리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북한에 계신 우리의 사랑하는 자매형제들과 자리를 함께 하여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한 글리은회의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하고, 또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외 선언서도 발표하는 등 용기 있는 위대한 신앙적 결단과 실천을 해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성서적으로 하나인 교회를 더욱 확고히 해갈 때 교단간의 협의 기구인 우리의 자리와 그 행동반경이 분명해진다고 믿습니다. 저는 성서적으로 하나인 교회를 분명히 하고 우리의 책임과 의무를 다할 때 하나님 선교를 위한 회원 교회밖의 모든 교회들과의 상호 연대는 필연적으로 온다고 믿습니다. 저는 성서적으로 하나인 교회를 더욱 확고히 해갈 때 한국의 복음화의 문이 더욱더 활짝 열린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