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근 목사와 KNCC 총무 인선의 혼란 (57회)
  제10장 배고픈 아시아 사람들과 함께한 CCA URM

정부당국의 음모로 흔들리는 한국 기독교교회협의회

서울에 가끔 오다보니 어쩔 수 없이 KNCC에 관한 일과 관계교단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당시 KNCC 총무는 인선 문제로 매우 시끄러운 상황이었다. 그것은 사실 교회 내 부에 의한 갈등이 아니라 KNCC를 좌지우지하려는 정보기관 때문인 것 같았다. 

1987년 6월 29일, 민주화를 요구하는 전국민적 항쟁에 직면해 불가피한 정치적 전략으로 <6.29선언>이 이루어졌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 선언이었지만, 군사독재를 청산하는 하나의계기가 되었다는 평가와 함께 한국사회 ,내부에서는 점차 민주화를 위한 발걸음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런데 <6.29선언> 후 거의 2년이 지났는데도, 한국교회는 민주화는커녕 여전히 권력기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 나는 마음이 몹시 안타까웠다. 

당시 KNCC 총무는 김소영 총무가 임기를 남겨놓고 갑자기 대한기독교 서회 사장으로 가게 되면서 갑자기 총무자리가 공석이 되어 버렸다. 다행히 오재식 선생이 공석인 자리를 지키고 있어 현상유지는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새로운 총무를 세우는 일은 1970~80년대의 KNCC의 위상을 지켜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였다. 많은 사람이 KNCC의 새로운 총무 인선을 그런 시각에서 바라보았고, 나도 그중 하나였다. 

새로운 총무를 뽑기 위한 인선위원회는 예장통합의 허일찬 목사, 감리교의 표용은 목사, 기장의 신삼석 목사, 구세군의 김광제 사관, 성공회의 김재열 신부, 복음교회의, 전병호 목사 등 총 6인으로 구성되었다. 기장의 신삼석 목사는 나중에 박광제 목사로 교체되었다. 

총무로 거론되는 사람은 자천타천으로 감리교의 조승혁 목사와 기장의 김상근 목사였다. 그런데 김상근 목사는 조승혁 목사가 KNCC 총무로 나서는 것을 곤란해 하는 눈치였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그 두 사람이 최종 후보자가 되어 선거를 치르기로 결정되었다. 

나는 앞으로 KNCC 위상을 세울만한 사람은 김상근 목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에 갔다. 예장통합과 감리교 인선위원은 이미 조승혁 목사에게 기울어져 있었기에, 나는 복음교단의 어른인 조용술 목사의 조언을 듣기 위해 군산으로 내려가거나 복음교단, 구세군, 성공회의 인선위원회 위원들을 찾아갔다. 

1988년 5월, 마침내 단일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인선위원회가 열렸다. 투표를 마치고 나오면서 인선위원 중 한 분이 다른 누군가를 향해 “어이, 이 사람아, 그러는 것 아니야.” 라며 핀잔조로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저 교단이 깨졌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동률이 나올 경우 새로운 사람을 후보로 세워 인선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들으니 일단 동료들은 아닌 것 같았다. 

투표결과 김상근 목사 4표, 조승혁 목사 1표, 기권 1표로 김상근 목사가 단일후보로 결정되었다. 내 생각에 예장통합이 기권하고 감리교는 조승혁 목사를, 나머지는 김상근 목사를 찍은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비로소 안심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시 홍콩으로 떠났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단일후보로 결정된 김상근 목사를 추인하는 실행위원회가 소집되었지만, 두 교단이 계속 불참하는 바람에 실행위원회가 열리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몇 개월 간 새로운 총무를 공표하지 못한 채 혼란만 거듭하고 있었다.
 
 
▲ 김상근 목사 [출처 ;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비록 몸은 홍콩에 있었지만, 나는 답보 상태에 있는 KNCC 총무 인선 문제에 대해 애가 탔다. 한 교단에서 김상근 목사의 진보적 강성 이미지를 거부한다는 설부터, 특정 지역의 인사 배척, 모 정당의 입김, 정보기관의 공작 등과 같은 여러 소문이 들려왔다. 
 
게다가 KNCC 총무 인선이 그토록 늦어지는데도 어디 하나 항의하는 곳이 없었다. 그것은 젊은이들의 집합체인가 기독 학생단체도 마찬가지였다. 참으로 답답한 상황에서 애꿎은 시간만 흘러갔다. 

그해 12월 중순, 서울에 출장을 온 김에 상심하고 있을 김상근 목사를 찾아가 만났다. 차를 마시며 답답한 심경을 토로하다가 다른 일정 때문에 인사를 하고 일어설 때였다. 김상근 목사는 내게 악수를 하며 “12월 말에 다시 서울에 올수 있겠소?”라고 물었다. 나는 “언제든 필요하면 올수 있습니다.”라고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김 목사는 “그때 쯤 KNCC 실행위원회가 열릴 거요. 그때 권 목사가 서울에 있었으면 좋겠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해서 실행위원회가 열리게 된 걸까? 왜 그동안 실행위원회가 열리게 된 과정을 한 번도 말씀하지 않았을까?’ 여러 궁금증이 생겼지만, 길게 얘기할 시간이 없었다. 

차를 마시는 동안 그런 얘기를 하지 않고 있다가 헤어질 무렵에야 그 얘기를 꺼낸 것도 무슨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하며 더는 묻지 않았다. 나는 홍콩으로 돌아갔다가 12월 말에 다시 서울을 방문했다. 

내가 서울에 온 것을 알았는지 김 목사가 내게 연락을 해왔다. 나는 곧바로 김 목사를 만나러갔다. 김 목사는 예상대로 실행위원회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실행위원회가 열리면 내가 신상 발언권을 얻어서 조건부 추천을 할 거요. 그리고 나는 권 목사를 추천할 겁니다.”

순간 나는 멈칫했다. 김상근 목사의 결단이 한편 이해가 되면서도 내가 나서야 한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했다.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상근 목사는 자신 의 계획을 소상히 얘기해주었다. 

“나는 실행위원회에 KNCC 총무를 언제까지 공석으로 놓아둘 수 없으니 모든 인선절차를 유보하고 내가 추천하는 기장 사람을 조건 없이 받겠다는 결의를 하라고 요구할 작정이예요.”

나는 법에 따라 인선위원회에서 뽑아놓은 총무 후보자를 원천봉쇄한 이들이 김 목사의 안을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얼마나 오랜 시간 고뇌하며 내린 결단일까’라는 생각이 들어 뭐라고 말을 찾지 못했다. 더군다나 나를 총무로 추천하겠다니 무슨 말이 나올 숙사 없었다. 

멍하니 있는 나를 바라보며 김 목사도 딱했는지 “KNCC 총무를 언제까지 공석으로 놔둘 수는 없지 않겠소.”라는 말만 거듭했다. 

CCA-URM 일을 하기위해 홍콩으로 가면서 짐을 정리한 데다 아내도 홍콩에서 겨우 자리를 잡고 교사생활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수입 또한 홍콩에 있는 것에 비하면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내가 KNCC에 가는 것은 가족들이 볼 때 무모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가야했다. 나는 더는 고민하지 않았다. KNCC는 내가 세상에 뛰어들 수 있게 받쳐준 마당이었다. 그 마당의 잡초를 뽑는 일이라도 주어진다면 마땅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실행위원회가 열렸다. 오전 10시에 개최된 실행위원회는 12시에 한 차례 정회하고 2시에 다시 속개하기로 했다. 정회시간에 김상근 묵사는 내게 “2시에 속개되면 얘기한 대로 내가 당신을 추천할 겁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설마 그럴 수 있을 까 생각하며 반신반의했다. 

다시 속개된 회의에 들어간 김 목사가 회의를 끝내고 나오면서 “모두 잘 결정했으니 이제 우리 집으로 갑시다.”라고 했다. 그날 김 목사의 집으로 갈 때 목사 한명이 동행했다.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김 목사의 집에 들어가니 이미 사모님이 저녁을 준비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를 하면서 김 목사는 그동안 각 교단의 상황과 KNCC에 관한 이야기 등을 풀어놓았는데, 내게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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