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이주여성노동자회 (56회)
  제10장 배고픈 아시아 사람들과 함께한 CCA URM

CCA-URM의 노동문제협의회 현장에서 건의된 내용 가운데 하나가 아시아이주여성 노동자프로그램을 독립적으로 집행하는 기구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독일 EZE와 협의하여 재정지원을 받기로 하고 ‘아시아여성노동자회’를 조직했다. 

위원장은 탄지경(아시아, 태평양 YMCA연맹 총무) 선생으로 하고, 실무자는 CCA-URM 직원인 메이안 비랄바(Mayan Villalba) 선생이 하기로 했다. 아시아 이주노동자룰 위한 이 단체는 한국에도 지부가 있다. 이것이 ‘아시아이주여성노동자회’이다. 이 기구가 여전히 각처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어 매우 기쁘다. 

여기서 1988년 1월 18일에서 23일까지 태국 챙마이에서 열린 제19차 CCA-URM 위원회 회의보고서를 참고하여 한국 URM과 관계된 부분을 잠시 언급하려고 한다. 이는 당시 한국 URM 현황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에서 URM을 하는 단체로는 영등포산업선교회, 한국교회의사회선교협의회,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 기독교농민회, 청주산업선교회, 한국탈춤선교회, 기독교환경운동연합은 기독교와 관련이 있는 단체가 아니었으나 전술상 기독교단체로 불렀다. 이처럼 CCA-URM은 교회 관계프로그램뿐만 아니라 교회 밖 단체들의 프로그램까지도 지원했다. 이는 한국 URM이 추천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른 나라의 경우 선교활동비는 소속 교회나 개인, 기관들이 보존하거나 선진국 원조기관들로부터 직접 모금을 하여 충당했다. 그러나 한국은 정부의 방해로 직접 모금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기독교 운동권뿐만 아니라 환경단체, 노동단체, 탈춤담체까지도 CCA-URM 네트워크를 통해 예산을 확보한 것이다. 

한국 기독교운동권은 이러한 예산을 기반으로 폭넓게 활동할 수 있었다. 그 영역은 기독교를 넘어 노동자, 농민, 빈민, 학생, 그리고 일반청년 등으로 퍼져나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전부당국을 비롯한 관계기관들이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언급한 것은 한국사회 전반이었기 때문이다. 
 
▲ 아시아여성노동자회를 만들어 메이안 비랄바 선생을 책임자로 모셨다

그들은 종교집회 외에는 일체의 집회를 용납하지 않았으며, 서너 명만 모여도 감시를 했다. 그러나 단체를 만들어서 활동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이들이 모인 단체는 거의 용공집단으로 매도당했다. 

한국 기독교운동권 단체는 정부기관으로부터는 이념적으로 공격을 받았고, 기독교 내부로부터는 거기에 더해 비기독교인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한다고 해서 비난받았다 .그래서 활동비 대부분을 해외의 지원으로 충당해야 했던 것이다. 일례로 1989년도 CCA-URM의 각 나라 예산 배정분이 68만 3,500달러인데 이 가운데 약 30.만 달러가 한국 URM으로 지원(참고 <1988년 챙마이 타일랜드 위원회 보고서>, 95쪽)된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다. 

이 기록만 보아도 CCA-URM에서 한국 URM이 차지하는 위상은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CCA-URM에서 차지하는 위상 역시 절대적이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CCA-URM은 WCC-URM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의 업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예산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확보된 예산은 CCA-URM의 예산 외에도 악포, ACW, DAGA 등 많은 단체의 예산으로 쓰였다. 나는 확보된 예산을 지원하고 관리해주는 역할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외에 내게 주어진 임무는 일주일에 한나라씩 방문하여 현장 실무자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들과 지역 현황에 대해 협의하고 그들이 맡은 업무가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지원하는 것은 중요한 일과였다. 주중에는 아시아 지역의 나라를 돌아다니고, 주말에는 홍콩으로 돌아왔다. 가끔 서울에서 한국의 URM 실무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당시 서울에는 오랜 해외거주를 마치고 귀국한 김재준 목사가 있었다. 김 목사는 캐나다에 잇으면서 해외 민주화운동 세력을 규합,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다가 귀국하여 노년을 한국에서 보내고 있었다. 김 목사는 내가서울에 갈 때마다 홍콩에서 제조되는 한뱡약을 사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그런데 김재준 목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홍콩에서 듣게 되었다. 그가 없는 서울은 쓸쓸함 그 자체였다. 김 목사가 내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그를 떠나보낸 후에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 올 일이 있어서 잠시 귀국했는데 김재준 목사의 막내 며느리인 이정희 장로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이 장로는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이것을 권 목사님에게 부치라고 주셨는데, 미처 부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면서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에는 우표와 함께 김재준 목사가 직접 쓴 주소가 적혀 있었다. 
 
▲ 김재준 목사가 내게 부치려던 편지봉투

나는 신학교 다닐 때 김재준 목사의 집과 가까운 곳에 살았다. 김 목사는 또한 우리 부부의 결혼식 주례를 서주기도 했다. 그런 인연으로 학교에 다닐 때나 졸업한 후에도 가끔씩 집으로 찾아가서 염치 좋게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하지만 그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런데도 나를 기억하고 병중에 있으면서도 붓으로 글을 써서 홍콩에 있는 나에게 보내려고 했다는 사실 앞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봉투를 열어보니 글씨가 빼곡히 쓰인 여러 장의 종이가 들어 있었다. 병중에 쓴 글이어서 그런지 글자에 힘이 없었다. 그렇지만 나를 생각하여 힘겹게 한자 한자를 써내려갔을 그의 모습을 생각하니 한없이 죄송한 마음과 감격스러운 마음이 교차했다. 

나는 그 길로 봉투를 들고 인사동에 있는 후배에게 가서 표구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되도록이면 제일 고급스러운 병풍으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지금 그 병풍은 우리집 안방에 놓여있다. 

그 병풍을 볼 때마다 김재준 목사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신학교 시절, 조용하지만 힘 있는 어조로 강의하던 모습, 그 후로 가끔 만났을 때의 모습들이 떠오른다. 8폭짜리 병풍으로 남은 김재준 목사의 채취는 언제까지나 기억될 최고의 선물이다. 이 병풍은 우리집 가보 1호이다. 

 
  피플스 포럼 -악포 주민조직과 훈련 (55회)
  김상근 목사와 KNCC 총무 인선의 혼란 (57회)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