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스 포럼 -악포 주민조직과 훈련 (55회)
  제10장 배고픈 아시아 사람들과 함께한 CCA URM

피플스 포럼 -악포 주민조직과 훈련

URM의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가 피플스 포럼( People"s Forum)이었다. 피플스 포럼을 통해 현장에 가서 지역에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악포(ACPO)를 통해 훈련시킨다. 

이것은 그라스루트 사건들이 각기 다른 자신들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의 큰 광장에 나와서 토론하고 종합하여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조직하여 ‘힘(Power)'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투쟁하여 경험을 축적해가고 의식화해 갈수 있는가가 문제였다. 

이런 점에서 CCA-URM은 모든 나라에 악포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악포는 FABC와 CCA-URM이 함께 아시아에서 ‘조직가’를 배출해내는 훈련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기구이다. 

편의상 악포의 상임고문은 CCA-URM 실무자가 맡았다. 이 상임고문이 조직훈련 담당자를 찾고 채용해서 예산을 확보하고 훈련장소를 결정하는 등 예산과 인사권을 가지고 CCA-URM 위원회, 그리고 FABC와 협의하여 일을 진행했다. 오재식 선생dl 그것을 처음 시작했다. 

CCA-URM의 선임자인 오재식 선생은 일찍이 필리핀에 페코(PECCO)를 조직하여 한국에서 빈민조직운동을 담당한 화이트 목사를 초청, 필리핀 톤도에서 이 조직가 훈련프로그램을 실시하도록 했다. 나중에 화이트 목사가 인도에서 이 프로그램을 실시하려고 했지만, 인도인들이 거부해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인도인들은 외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않으려고 했고, 특히 미국을 싫어해서 더더욱 지원을 받지 않았다. 결국 인도 전체에서 실시하려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고, 마드라스(현 첸나이) 지역프로그램으로만 실시되었다. 화이트 목사는 마드라스에 몇 년간 머물며 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내가 CCA-URM 실무자일 때에는 화이트 목사에게 훈련받은 유싱코 신부를 초청하여 페코를 통해 필리핀에서 조직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그러나 2년 후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빈민조직훈련프로그램을 실시하던 중 불행하게도 과격한 무슬림 단체의 공격을 받는 바람에 프로그램이 중단되었다. 

하지만 다행히 필리핀, 한국, 태국 등wl에;서는 지금도 악포 프로그램이 계속 진행되고 있고, 다른 아시아연대 프로그램도 실시되고 있다 다만 조직의 이름은 바뀌었다. 내가 CCA-URM 실무자로 있을 때 악포의 코디네이터는 필리핀의 노엘 비랄바(Noel Villalba) 목사였다. 호임은 인도의 라잔 싱(Rajan Singh)이 맡았다. 
 
▲ CCA-URM 기념행사 때 만난 악포 책임자 라진(왼쪽에서 두번째)

아시아 여성노동자회

아시아 지역에서 여성 이주노동자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FABC와 CCA-URM이 ‘아시아사여성노동자회(asian community for woman, AVW)’를 조직하기도 했다. 

초창기 간사는 일본의 시오자와 선생이었고, 내가 CCA-URM실무자일 때에는 한국의 JOC 출신인 이철순(이마리아) 씨가 담당했고, ACW는 CCA-URM 실무자가 예산도 마련하고, 상임 컨설턴트로서 FABC 의장과 협의하여 인사권을 가지고 일을 했다. 
 
▲ CCA-URM 이철순 아시아여성노동자회(ACW) 총무(앞줄 가운데)

아시아 액션그룹 자료센터

CCA-URM에서는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고 보관하며 이 자료들을 나누는 일도 담당했다. CCA-URM 자료 수집과 보관을 위해 일찍이 도쿄에서 자료센터인 ‘DAGA(documentation for action group in Asia)'가 세워졌다. 

DAGA 사무실은 URM 사무실이 홍콩으로 옮겨지면서 함께 홍콩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 후 자료센터가 각처에 많이 생겨 우리는 URM이 필요한 아시아 그라스루트 자료수집에만 주력하기로 했다. 

DAGA이야기를 하다 보니 CCA-URM 실무자로서 본의 아니게 지극히 사무적인 편지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일이 생각난다.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지명관 선생은 한국에서 보내주는 자료들을 받아 ‘TK선생’이라는 필명으로 일본의 월간지인 <세카이>에 글을 연재하고 있었다. 

지 선생의 수고비가 CCA-URM의 예산과 관련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CCA-URM의 실무자가 아프리카 성공회 신부인 캔 데이비드로 바뀐 데다 마침 지 선생이 기고하는 데 드는 비용을 선생이 근무하던 대학에서 책임지게 되었다고 한다. 

데이비드 신부는 이러한 사실을 확인한 뒤 나에게 지 선생에게 지불하는 비용을 삭감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좀더 확인해보겠다고 하고는 전임자에게 물었더니 오재식 선생에게 문의하라고 해서 다시 오 선생에게 문의했다. 하지만 오재식 선생은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으셨다. 

나는 내가 알아서 하라는 뜻으로 알아듣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고 해서 지 선생에게 경비를 이중 지급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더는 경비를 지급하지 않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한국에서 자료를 모아 해외로 보내는 것은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관계했으며,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의 마음을 졸이게 하던 일이었던가. 그것은 일본과 한국의 NCC 총무들, WCC-URM 담당자, CCA-URM 담당자, 원조기관, 이외에도 자료와 관계된 여러 사람이 머리를 짜내어 만든, 암울했던 시절의 귀중한 프로그램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지명관 선생은 아마 그 자료가 어떻게 갔는지 몰랐을 것이다. 언젠가 지 선생이 어느 신문에 연재한 것을 보았는데, 그 자료에 관한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이 어른이야말로 아무것도 모르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니 내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DAGA는 CCA-URM 실무자가 위원장이 되어 인사권과 예산 확보, 예산 집행권을 가지고 CCA-URM 위원회와 협의하여 사업을 진행했다. 내가 DAGA 위원장일 때에는 필리핀의 노엘 비랄바 목사가 실무를 맡았다. DAGA의 초창기에는 한국의 김용복 박사와 일본의 구라타 마사히코(Kurata Mashahico) 선생 등이 실무자로 수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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