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지역 모든 ‘그라스루트’ 사람들의 문제 (53회)
  제10장 배고픈 아시아 사람들과 함께한 CCA URM

한국소식이 일본 <세키아>에 연재되다

자료집 이야기가 나왔으니 인권위원회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 더 해야겠다. 그것은 <광주민주화운동 자료집>이야기다. 당시 인권위원회 광주 간사였던 조봉훈 선생은 자료를 모으고 남몰래 집필하여 이 자료집을 완성했다. 

나는 나중에서야 조 선생에게서 완성된 자료집 몇 권을 받았을 뿐이다. 조 선생은 이 작업을 하는 동안 마음 졸이고, 쫓기며, 참고,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인권위원회는 실무자 수는 많지 않았지만, 직원들이 목요기도회를 준비하고, 인권소식지도 내고, 또 이것을 세계각지에도 보내기도 했다. 우리의 정보를 기다리고 있는 미국, 캐나다, 독일, 호주, 일본, CCA, WCC 등 많은 나라와 인권단체에 교회와 교회 밖 자료들을 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군부대 배낭까지 활용했다. 
 
일본에 체류 중이던 지명관 교수는 이렇게 보내진 자료들을 모아 ‘TK'생이라는 필명으로 <세카이>에 연재하기도 했다. 

당시 인권위원회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기관, 해외동포, 외국인들의 지원과 협력이 없이는 살림과 업무를 감당할 수 없었다. 수많은 기관과 뜻있는 분들, 그리고 이름 모를 이들의 눈물어린 성금덕분에 일을 할 수 없었다. 참 기적 같은 일이었다 싶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모든 손길위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심지어 ‘한국인권 신장을 위한 북미연합’이라는 이름의 인권단체는 우리를 지원하기 위해 1985년 12월 13일 인권상을 수여해주기도 했다. 같이 일한 분들(윤수경, 구창완, 강구철, 유태선, 성남욱, 박광혜 등)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1986년 5월, 나는 건강도 좋지 않고, 쉬기도 싶고 해서 CCA-URM 책임자로 오라는 조지 나이난 신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KNCC 인권위원회 사역을 정리하고 홍콩으로 떠났다. 그 자리는 오랜만에 내 적성에 맡는 자리를 자청해서 찾아간 일터였다. 

CCA는 아시아지역 교회 회원들이 모여 교회 안 상호협조와 선교활동 중진 등을 모색하기 위해 설립된 동아시아기독교교회협의회(EACC, 1959)를 1973년 확대, 개편한 것이다. 내가 있을 때 CCA에는 네팔, 뉴질랜드를 포함하여 16개국이 회원국가로 들어와 있었다. 인도차이나에서는 라오스만 들어 있었다. 

CCA-URM을 담당하던 인도 성공회 신부 조지 나이난(A. George Ninan)은 벤쿠버에서 열린 WCC 제7차 총회(1983)에 나를 초청해주었다. 나이난 신부와는 그전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이 총회 후에 오재식 선생과 타드 목사는 내가 한 달 동안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농민, 노동자, 빈민 현장을 돌아다니며 안목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나는 뉴욕에서는 화이트 목사, 시카고에서는 타드 목사,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모이어 목사 등을 통해 현장을 둘러보고 실무자들을 만나서 도시농촌선교회(URM)에 관한 시야를 넓히게 되었다.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 사무국장 시절. 천안지역 인권위원회 조직 

WCC총회는 정부가 비자를 내주지 않을 때는 갈수 없었지만, 여건이 되면 다녀오곤 했다. 밴쿠버에서 만난 나이난 신부는 내게 자신의 후임으로 오라는 제안을 했다. 
 
나는 당시 맡은 업무도 있고, 한국을 떠날 상황도 아니라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고 그의 제안을 유보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심신이 지쳐버린 나는 1986년 초,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인사 절차를 밟아 CCA-URM 간사 직을 맡게 되었다. 

CCA-URM는 아시아지역 도시농촌 선교기관이다. 이 기관이 점차 확대, 발전하면서 도시빈민, 노동자, 농민, 어민, 원주민, 소수민족, 산족(말레이시아의 산에서 사는 사람들), 이주 노동자들의 문제를 광범위하게 다루게 되었다. 덧붙여 그들의 문제와 깊이 관련된 신학, 경제, 다국적 기업, 환경문제까지 관여하는 선교기관이 되었다. 

아시아지역 모든 ‘그라스루트’(바닥 사람들, 풀뿌리)의 문제를 다루게 된 것이다. CCA-URM은 16개 회원국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각종 문제, 그리고 그 문제들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조직화해 나갈 수 있도록 돕고, 스스로의 조직된 힘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나도 사람이다.”:라고 선언할 수 있도록 의식화에 이르게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CCA-URM의 지도 인사로는 인도 성공회의 해리 다니엘(Harry Daniel) 신부(나중에 CCA-URM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본의 마사오 다케나카 교수, 한국의 오재식 선생, 그리고 인도의 조지 나이난 신부 등이 있었다. 

이들의 배후에는 CCA-URM이 있고, URM을 지원하는 세계 회원단체들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감리교의 조승혁, 조화순 목사, 통합의 조기송 목사, 기장의 이국선 목사 등이 URM 활동을 했다. 선교방법은 조금씩 달랐지만, 이들은 한국 URM의 1세대라고 할 수 있다. 2세대로는 인명진, 정진동, 김동완, 김경락, 안광수, 이규상 등을 들 수 있고, 나도 이 세대라고 할수 있다. 

CCA-URM은 CCA 조직 안에서 특별독립위원회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프로그램 예산이 독립채산제와 비슷했다. CCA-URM은 교회 내부 조직이지만, 선교적 사명을 띠고 아시아의 바닥 운동권에 그 선교의 ‘자리’를 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프로그램과 예산이 독립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CCA 본부는 싱가포르에 있었다. 그러나 URM 사무실은 독재정권인 싱가포르에 두지 못하고 도쿄와 홍콩에 두었다. 그 즈음 URM운동의 내용과 방향은 한국 URM이 주도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한국의 노동현장, 농민현장에는 성직자나 학생들이 속속 투입되어 사람들과 함께 고난을 나누면서 조직화됨으로써 한국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이 단계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나는 한국교회의 URM이 한국사회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한편 이러한 바닥운동권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해직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연구되어 민중신학이 탄생했는데, 이 민중신학은 세계 신학자들을 크게 자극하였다. WCC에도 큰 영향을 미쳐서 WCC 총회나 프로그램 등에도 그 내용이 반영되었다. 민중신학 1세대로 현장 판자촌의 경험이 있는 문동환, 현영혁, 서남동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WCC는 개발도상국의 경제, 사회 발전을 위한 프로젝트를 만들거나 관리하는 ‘유엔개발계획’((United Nations Special Development Programme)과 같이 교회개발참여위원회 프로그램을 전개했는데, 이 프로그램은 1960년대 말부터 CCA-URM 프로그램에 비하여 현저하게 규모가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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