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민주화 운동 자료집> 발간 (52회)
  제9장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KNCC 인권위원회는 매년 인권문제전국협의회를 개최하고 인권선언문을 냈으며, 이 인권선언문을 근간으로 인권주간 행사의 주제를 결정하여 인권주간 행사를 실시했다. 또한 인권주간 행사에서 다 수렴하지 못한 사건들은 수시로 성명서를 냈다.
 
한편 인권위원회는 1985년 10월 7일 김근태 씨 고문사건 청원서를 념겨 받아 고문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김상근, 서기에 금영균, 위원에 조승혁, 이우정, 오충일 목사를 선임하여 교회 안팎에서 고문, 폭력 추방을 위한 조직적인 홍보와 그 대책을 마련했다. 

고문대책위원회는 1985년 11월 21일 KNCC 회장단과 20개 교단장 및 총무연속회의를 개최하고, 대책위원회 5회, 각 교단 교단장 및 총무 초청간담회 4회, 재야대표 초청간담회 등을 실시했다. 

그리고 각종 항의서, 탄원서, 목회 서신발송, 대통령 면담요청, 기도회 개최 등 다각적으로 활동했다. (참고 <한국기독교교회 협의회 제35회 총회보고서>, 110쪽) 당시 구속자가 너무 많아서 인원을 다 파악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에 따라 법률구조활동도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시대는 암울했지만 인권위원회에 적극적으로 협력을 자청하며 변호를 요청하는 변호사들은 전국적으로 늘어났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이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1년에 한번, 인권위원회 명의로 송년잔치를 열었다.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이 송년잔치에 갔다 왔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우리는 이 흐름이 나중에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협의회(民辯)를 탄생시켰다고 보고 있다. 

당시 우리와 함께 한 변호사로는 서울의 한승헌, 홍성우, 이세중, 이돈명, 이돈희, 유현석, 조준희, 황인철, 조정재, 광주의 홍남순, 부산의 김광일, 노무현 등이 기억에 남는다. 

김정남 선생은 변호사는 아니었지만 이돈명 변호사 사무실에 가보면 항상 무언가를 쓰면서 열심히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일과가 끝나면 정보교환을 위해 홍성우, 조정래 변호사, 그리고 김정남 선생과 매일 저녁 식사를 했다. 

그 당시 양심수 가족모임이 조직되었는데, 가족들의 하소연은 다 들어주지 못하고, 겨우 1년에 한 번씩 담당자가 나가서 가족위로 잔치랍시고 식사를 같이 한 것이 전부였다. 생각하면 아쉽기만 하다. 실무자들이 동분서주하며 뛰어다니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1970년대 민주화 운동 자료집> 발간 

정신없이 분주한 가운데 KNCC 인권위원회는 1970년대 민주화운동을 정리하는 인권자료집 발간을 책임지게 되었다. 우리는 이 자료집 발간을 일찍부터 진행했다. 하지만 정보기관들이 인권위원회 활동을 일일이 직시하고 있어서, 어떻게 자료를 수집하고, 어디서, 누가 집필하느냐가 고민이 되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을 인권위원회의 윤수경 선생에게 맡기기로 했다. 윤 선생에게 맡긴 이후로 나는 그 일에 대해 관여하지 않았다. 준비가 거의 다 된 상태에서 집필 장소가 천호동 기독교아파트에 있는 진연섭 교수의 집이라는 것과, 윤 선생을 도와 구창완 씨(현재 대만의 대학에서 선교사로 시무)가 집필을 하기로 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나는 자료가 산더미같이 쌓인 방을 두어 번 방문했을 뿐이다. 원래 이 자료집은 1979년 김관석 목사가 KNCC 총무로 재직할 당시 만들기로 결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집필하기로 한 성공회대 이대용 신부가 갑자기 유학을 떠나는 바람에 중단되고 말았다. 
 
▲ <1970년대 민주화 운동 자료집> 책자

당시는 이런 자료집을 집필하는 것은 고사하고 자료를 모으는 것도 힘들 때였으나, 윤수경 선생과 구창완 목사는 희생을 각오하고 이 방대한 자료를 모으고, 구석방에서 집필하여 마침내 <1970년대 민주화운동>을 탄생시켰다. 

나는 이 자료집이 지금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두 분께 감사를 드린다. 당시 인권위원회 위원장인 조용술 목사는 “머리말”을 통해 이 자료집의 발간 의의와 그 과정을 밝혀놓았다. 그 일부분을 옮겨본다. 

돌이켜보면, 한국교회가 유신독재정권과 치열한 싸움을 벌일 때, 훗날을 위해서 자료를 보관해야 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때그때 대처하기에도 숨가쁠만큼 돌아갔고, 정보원들의 눈초리가 늘 우리를 뒤따랐다. 

어느 때 어디서 끌려갈지, 가택수색을 당할지 모르는 판국에 자료의 보관이란 그 다음의 문제일 뿐 아니라 피해를 가져다줄 화근이 될 소지가 많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일기나 메모형식이나마 일체의 기록을 남기는 행위를 기피하였고, 위험이 느껴질 때마다 자료를 소각하는 소동을 벌이곤 하였다. 

특히 1975년에 발동되어 1979년까지 지속된 긴급조치 9호는 정권유지에 불리한 모든 언행을 유언비어, 사실왜곡, 반국가행위로 몰아치면서 동 조치를 “위반하는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 수색할 수 있다.”라고 위협하고 있는 터였다. 

이런 지경이었으므로 인권위원회는 자료들이 모이면 정리할 여유도 없이 보따리를 만들어 여기저기 숨기기에 바빴다. 그리고 그 가운데 몇 개는 끝내 찾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1970년대를 마무리 짓는 1979년, 인권위원회는 1970년대 한국교회의 뼈아픈 체험들은 전하고, 그 교훈들을 정리하여 1980년대를 대비하기 위해 자료집을 내기로 계획하여 성공회 이대용 교수에게 그 작업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이 신부가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자 그 작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 후 1980년대 초반의 격랑 속에서 중단된 작업을 계속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가 1984년 신임 인권위원회 사무국장 권호경 목사가 의욕적으로 이 작업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로 제약된 조건 속에서 진행된 이 작업은 결코 손쉬운 것이 아니었고, 이 정도의 책자를 내는 데에도 2년 이상의 기간이 흘렀다. 그러나 마침내 2,000여 명의 방대한 자료집을 내어놓게 되니 실로 감회가 새롭다. 

그동안 흩어져 있던 자료들을 모으고 그 낱장들을 정리하여 충실하게 기독교인권운동사를 엮어주신 윤수경 여사와 구창완 선생의 노고에 대하여 진심어린 감사와 위로의 말씀을 전하며,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를 뒷받침해온 김관석 목사와 인권위원회의 직책을 떠난 이후에도 이 작업의 마무리를 위해 수고한 권호경 목사 등 여러분께 각별한 인사를 드린다. 

그 외에도 직접, 간접으로 관심을 갖고 도와준 국내의 교계 여러분과, 특히 제자(題字)를 써주신 김재준 목사님께 심심한 가사의 말씀을 올린다.      

언론, 출판의 자유가 제한된 이 상황에서(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다고 하지만) 이런 책을 만들다보니 시설 좋은 인쇄소에서 드러내놓고 작업을 못하여 편집, 인쇄, 제작 상에 많은 애로와 문제가 있었음도 아울러 밝히면서 하루속히 이러한 우리의 현실이 타개되기를 간구한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에 수록된 자료와 사실들은 유신 암흑가에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발표했거나 행한 것들이다. 또한 기독교인권운동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재야, 지식인운동까지 상세히 기술하여 70년대 인권운동을 전체적으로 조명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이 책이 앞으로의 기독교인권운동뿐만 아니라 신학, 사회학, 정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귀한 자료가 되고 많이 이용될 것을 기대한다. 

198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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