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5가 인권위원회 (49회)
  제9장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CBS사장 시절 김관석 목사는 점심이나 같이 하자며 가끔 연락을 했다. 어느 날 걸려온 김관석 목사의 전화도 평소처럼 식사나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헤어지던 어느 날과 달리 김 목사는 이야기를 하자면서 CBS집무실로 나를 데려갔다.

차 한 잔을 놓고 마주 앉아 있는데, 김 목사가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는 듯 나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KNCC 인권위원회를 이대로 놓아둘 수 없으니 권 목사가 맡아주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있어......”

별다른 설명 없이 이 한마디를 꺼내놓은 김 목사는 말끝을 흐렸다. 나는 뭔가 사정이 있어 어렵게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이라고 짐작하면서도 곧바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건 곤란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더는 계속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곧바로 일어나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 뒤 별다른 언급이 없길래 나는 일이 잘 해결된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사선 일에만 몰두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술 목사(당시 KNCC 회장)가 사선 사무실로 나를 찾아왔다. 군산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터라 서울에 올라오면 할 일만 하고 곧바로 내려가는 분인데, 굳이 나를 찾아온 것은 인권위원회 일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케 했다. 조 목사는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들이 인권위원회는 이제 권 목사가 맡아야 한다고 해.”

평소 존경하던 두 어른이 이렇게까지 따로 말씀하니 그제야 ‘이 어르신들이 다들 왜 이러실까?’하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 일을 상의하기 위해 박형규 목사를 만나러 갔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박 목사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듣기만 하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나는 박 목사의 의중을 듣고 싶었다. 내가 그를 찾아간 것도 보다 확실한 내용과 내가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짚어줬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하지만 그는 평소처럼 무엇을 딱 집어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별 도리가 없지 않느냐”라는 식으로 말할 뿐이었다. 내가 “그럼 사선은 어떻게 하시려고요?”하고 물어도 별말이 없었다.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서 한동안 골똘히 생각했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이우정 교수에게 연락이 왔다. 할 말이 있으니 KNCC 사무실로 오라는 것이었다. 총무실에 들어서자 김관석 목사와 이우정 교수가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인권위원회에 대한 이야기가 틀림없었다. 

그 자리에서 이 교수는 “다른 이야기는 된 것 같으니 권 목사가 짐을 질 수밖에 없네, 뭐.”하면서 내가 결정해주기를 은근히 강요했다. 나는 이우정 교수까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이미 교계 어른들이 이 문제에 대해 모두 합의를 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 조용술 목사 / 전북 군산에서 목회를 하는 통일운동가다 [출처 ;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그렇지만 내가 사선을 사임하고 인권위원회로 가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사선은 신구교가 연합한 조직으로 가톨릭 쪽에서 동의를 해주어야 탈 없이 떠날 수 있는 곳이었다. 사선에 가게 된 것도 나를 내놔야 김승훈 신부를 내놓겠다는 지학순 주교의 요구 때문이었다. 그러니 개신교 쪽에서 합의를 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미 어른들이 합의한 내용을 뒤엎을 수는 없었다. 그들이 그렇게 합의를 한 이상 나로서는 여러 가지 변수를 생각하고 내린 결정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KNCC위원회로 옮기는 것에 대해 많은 오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안고 가야겠다고 나름 다짐도 했다. 

KNCC 인권위원회로 가는 것은 개인적으로 큰 결심이었다. 그것은 교회라는 제도권 속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예상한대로 사선에서는 여러 사람이 내가 인권위원회에 가는 것은 반대했다. 특히 가톨릭 측의 이창복 선생이 몹시 언짢아했다. 그는 사선이라는 큰 연합조직에서 해야 할 일이 더 중한데, KNCC 인권위원회로 가는 것이 전체 운동에 도움이 되는 거라고 반문했다. 

물론 그러한 생각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사선이 점차 활성화 되는 마당에 핵심 실무자가 빠져버리면 그동안 진행해오던 일이 어떻게 되겠는가에 대한 걱정이 더 앞섰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선 프로그램은 어느 정도 정착이 되었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사선 프로그램은 각 분야에서 추천한 실행위원회가 결의하여 집행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실무자가 바뀐다 해도 크게 걱정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많은 사람이 KNCC 인권위원회가 좀 더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권위원회 차원에서 실시하는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개편할 필요가 있었다. 각 지역이나 교회 안에도 인권위원회가 있었지만, 종로5가의 인권위원회는 특별한 존재였다. 그것은 KNCC 산하에 있는 기구 이상이었다. 

사람들은 인권위원회가 단지 종교라는 틀 안에서만 활동하는 그런 위원회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인권변호사나 해직교수, 그리고 구속자 가족들을 위로하고 지원하는 일뿐만 아니라 노동자, 농민, 빈민, 학생 등 인권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어우러지는 광장이 만들어지길 바랐다. 

이미 인권위원회가 가야 할 방향은 사람들에 의해 정해지고 있었으니 나는 그 의견들을 잘 묶어내어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나가면 될 터였다. 

KNCC 인권위원회가 만들어진 배경 또한 이러한 프로그램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인권위원회는 1970년대 초, 3선 개헌과 유신헌법의 발동 등으로 그 탄생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박정희의 군사독재는 끝 간 데를 모르고 날이 갈수록 활개를 쳤다. 정부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는 개신교는 그런 점에서 그들에게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개신교에서 시행하는 활동에 군부독재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담겨있는 것을 갈파하고, 억압적인 통치 속에서 그 싹이 될 만한 것은 무조건 없애려고 했다. 

인권위원회는 박정희 정권이 개신교, 특별히 종로5가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에 주목하고 있을 때 일어난 전주 은명기 목사 구속사건이나 남산 야외음악당 부활절연합예배사건 등으로 박형규 목사와 수많은 청년, 학생들이 연행, 구속되는 과정에서 창립되었다. 

이때는 KNCC 김관석 총무가 재임할 때였으니 인권위원회가 탄생한 것은 김관석 총무의 지도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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