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한 정국, 신구교 바닥운동 재정비 (46회)
  제9장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혼란한 정국, 신구교 바닥운동 재정비

떠났다가 돌아오면 언제라도 반겨주던 교회, 내게 한없이 고마웠던 공간인 서울 제일교회를 그만둔 것은 박형규 목사와 지학순 주교의 약속 때문이었다. 

“개신교에서 ‘권호경’이를 내놓아야 가톨릭에서 사선위원장을 맡을 신부를 내놓겠다고 해.” 미안해하며 말하는 박형규 목사의 부탁을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1981년부터 사선총무로 일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3년 만에 기독교 사회운동권으로 복귀한 셈이었다. 

1980년 신군부세력인 전두환 정권이 등장하여 5.18민주항쟁을 무참히 짓밟은 직후 사회는 무척 혼란스러워졌다. 기독교 민주화운동도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시기였다. 
            
사선은 1971년 1월 CCA-URM간사인 오재식 선생이 주도적으로 조직한 단체였다. 나는 당시 수도권 주모간사로 오재식 선생이 요청하는 심부름을 하였다. 오 선생은 일찍이 시카고 알린스키 재단의 조직론을 한국 기독교 운동권에 꼭 접목시켜야 할 필요한 프로그램이라고 인식했다. 그래서 연세대 도시문제연구소 위원으로 주민조직 프로그램에 적극 협조한 것이다. 

한편 오 선생은 한국 기독교학생운동을 통합하는데 주력하여 YMCA와 KSCM을 통합한 KSCF총무로 있으면서 학사단을 조직하여 빈민, 농촌지역에서 조직운동을 시도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산업선교의 선도사인 조지송, 조승혁 목사를 알린스키 재단의 조직운동 프로그램에 참여시키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오 선생은 한국 개신교와 가톨릭의 모든 그라스루트(바닥운동)의 조직화가 급선무라는 사실을 인지했던 것 같다. 그래서 통합, 감리교, 기장의 모든 산업설교의 실무자, 가톨릭노동청년회(JOC), KSCF, YMCA, YWCA, 가톨릭기독학생회, 가톨릭농민회, 개신교 기독농민회, 수도권, 빈민사목 등 모든 기독교 운동권 세력을 한데 모아 사선을 조직한 것이다. 

그는 기독교 모든 운동권이 조직화 되어 힘, ‘피플스 파워(people power)’로 표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1970년대 전후 세계 기독운동의 흐름이기도 했다. WCC-URM과 CCA-URM은 유엔(UN)을 비롯한 모든 NGO조직들이 개발프로그램을 넘어 주민조직화 내지 주민의식화를 통해 피플스 파워를 형성해야 올바른 사회개혁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출해낸 것 중의 하나가 알린스키가 시카고 빈민촌에서 이룬 빈민운동 조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60년대를 전후를 유엔과 WCC는 개발이라는 용어로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개발은, 개발의 주체인 사람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등 개발도상국에서 뿐만 아니라 선진국의 뒷골목이나 판자촌 뒷골목에서도 사회의 주인공인 인간은 점점 비인간화되었고,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러한 세계적 흐름 속에서 오재식 선생은 산업선교, 빈민선교, 학생운동, 노동운동 등 각 분야별 실무자들의 훈련과 조직화가 시급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 URM 선배들 / 왼쪽부터 권호경, 타드 부인, 나이난 부인, 조지 나이난, 이은자, 조지 타드

오재식 선생은 그의 회고록 <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에서 ‘현장’이라고 표현한 사람들, 즉 농민, 노동자, 빈민, 학생이 한데 어우러져 조직되고, 이것이 힘이 되어 사회 구석구석에서 힘으로 표출되길 희망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이 주인이 되는 인류사회를 꿈꾸며 사선을 조직했을 것이다. 이것은 1971년 조직당시 아무것도 모르고 조직 심부름을 한 나의 생각이다.
 
1971년 말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첫 모임을 가졌는데, 이때 갑작스런 문제가 발생했다. 충분한 대화와 협의가 부족해서 일이 난 헤프닝이었다. 각 교단의 산업선교회는 오래전 에 조직되어 많은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단체에 소속된 분들이 오해를 하여 오재식 선생이 외국 돈을 끌어다가 산업선교를 망친다며 플래카드를 들고 모임장소에 찾아온 것이다. 

오 선생은 몹시 당황해했다. 내가 그 현장에 있었기에 그때 일을 잘 기억한다. 다행히 서로 잘 이해하여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다. 이날 모임에서는 알린스키재단에서 조직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조승혁 목사를 총무로 선임했다. 사선의 처음 명칭은 한국교회도시산업문제협의회였다. 그리고 그해 9월 28일, 크리스천사회행동협의체로 이름을 바꿨다. 

CCA-URM으로 운동권 재정 지원물의 일원화

사선은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다. 나는 이 기관의 총무로 일하면서 사무실을 종로 5가에 있는 기독교회관 901호로 옮겼다. 10평 정도 되는 공간이었다. 

사무실을 옮긴 되 조직을 개편하여 고문에는 지학순 주교와 박형규 목사, 회장은 김승훈 신부, 부회장은 조지송 목사, 조화순 목사, 함세웅 신부를 세웠다. 또한 학생운동, 산업선교, 농민운동, 빈민운동 등 각 분야의 대표들을 실행위원으로 세워 역할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리고 지도위원으로 교계지도자들을 세웠다. 

나는 사선의 실무자로 일하고 있던 천영초 간사와 이후 들어온 최혁배 간사, 구선희 씨와 함께 일을 시작했다. 이들과 가장 먼저 한 일은 조직을 점검하는 일이었다. 

각 분야별 조직을 확인하고, 재정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당시에는 국내 지원을 받기가 무척 어려웠다. 개인이나 교회가 사선을 돕겠다고 나설 경우 정부의 각 기관들이 개입하여 그 개인이나 단체가 불이익을 받게끔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정은 거의 대부분 CCA-URM의 유럽 NGO 등의 지원으로 충당했다. 

CCA-URM에 근무할 당시 태국 쟁마이에서 개최된 1988년 CCA-URM회원(1월 1~23일)에 제출된 보고서를 보았더니, CCA-URM의 1년 예산 131만 9,500달러 가운데 각 나라(16개국)에 지원한 금액이 68만 3,500달러인데, 이중 사선을 통해 한국 URM 등에 지원한 총액이 28만 6,000달러였다. 

각 나라 지원금의 거의 절반을 내가 끌어온 셈인데, 그것은 모두 한국 기독교운동단체에 지원되었다. 이러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CCA-URM의 과거 실무자들인 한국의 오재식 선생, 인도의 조지 나이난 주교, 그리고 CCA-URM실무자인 인도의 헨리 다니엘 신부, 미국의 조지 타드 목사,. 아프리카의 캔 데이빗 신부 등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CCA-URM이나 WCC-URM은 한국의 기독교운동권뿐만 아니라 일반 운동권 활동에도 직간접적인 지원을 했다. 그 중 하나가 <말>지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해직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발간된 <말>지는 CCA-URM의 지원금을 받아 창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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