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용 수도권 간사의 기자회견 (45회)
  제8장 유신체제에 반기를 들다2

장기 구금 상태에 있는 실무자나 관계자들을 심문하는 내용은 비슷했다. “박형규 목사에게 무엇을 배웠는가?” "박형규 목사가 뭐라고 했는가?” “너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지만, 박 목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냐?” 등의 질문을 하면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때리기 시작했다. 

이규상 목사에게는 박형규 목사가 공산주의자라고 한 70여명의 목회자 서명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또 박 목사가 한신대에 있을 때 “기독교와 공산주의”라는 강의를 했는데, 이 강의를 들은 한신대 졸업생들을 모두 잡아들이기도 했다. 

나에게는 비슷한 협박과 회유가 이어졌다. 감금된 지 3~4주 되었을 때 수사관이 나에게 “그동안 잘 버텼다. 나는 나간다.”라고 홀가분하게 말하며 나갔다. 그 수사관은 나중에 단국대 교수가 된 공기두였는데, 마르크스와 관련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어쩌면 이때의 조사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싶다. 

홀가분하게 나간 공기두 수사관은 월요일이 되자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표정이 말이 아니었다. 억지로 수사를 맡아야 하는 억울함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다.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또 다시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하고, 또 했다. 

한번은 그가 몽둥이를 들고 오길래 ‘아, 이제는 본격적으로 때릴 모양이다.’라고 생각하고 눈을 질끈 감았는데, 갑자기 몽둥이로 벽을 치는 소리가 났다. 그는 몽둥이로 벽과 바닥을 치면서 때릴 듯이 시늉만 하고, 일부러 큰 소리로 윽박지르기도 했다. 마치 옆방에서 들으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한 달 동안 대공분실에 있다가 7월 3일에 허병섭, 김동완, 이철용, 황인숙, 모갑경 등과 함께 기소유예로 나왔다. 이규상 목사는 7월 6일 불구속 기소로 석방되었다. 

박형규 목사를 공산주의자로, 기독교 사회운동단체 실무자들을 용공으로 몰아가려는 것은 착각과 자기모순에 빠진 자들, 즉 시경 부국장 김재국 장로와 같은 자들이 무리하게 시도한 공작이었다. 남산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보낸 한 달은 그동안 조사받은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고 괴로운 시간이었다. 

석방된 뒤 돌아보니 처음 구속된 이철용 간사가 서대문경찰서에서 탈출하여 이 사건을 ‘박형규 목사를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는 사건’이라고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했다고 한다. 이철용 간사가 이 사건을 세상에 폭로하기 위해 세운 계획은 실로 용의주도했다. 

경찰서를 탈출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일부러 같이 잡혀와 있던 황인숙 간사를 구타했다. 그러자 직원들이 모두 몰려와 말리고, 황인숙 간사를 여관으로 옮겼다. 그는 “당신들이 박형규 목사를 간첩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황인숙은 간첩조카인 셈이다. 간첩 조카를 때리는 것이 뭐가 어떠냐?”라고 하면서 서대문경찰서 직원들의 마음을 샀다. 

이후 서대문서 직원들은 이철용 간사에 대해 구슬려보자는 식으로 태도를 바꾸어 나갔다고 한다. 

그 뒤 그는 낮잠 자는 시늉을 하며 직원들을 안심시킨 뒤 태연스럽게 정문으로 걸어 나가서 아무 버스나 타고 그곳을 탈출했다. 그런데도 아무 일이 없자, 구애련 선교사에게 연락해 허병섭 목사와 김동완 목사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런데 확인해보니 그들도 모두 잡혀가고 없었다. 

그는 구 선교사와 함께 녹음기를 준비하며 합정동 수녀원으로 가서 이 사건과 관련된 내용을 구술하여 녹음하고 호소문 다섯 장을 작성하였다. 여기서 이철용 간사의 기지가 돋보인다. 그는 호소문 두 장과 녹음테이프를 제작한 것처럼 해놓고, 나머지 호소문 중 세장은 김관석 총무에게 전하도록 하고, 가짜 테이프를 경찰에 건네줄 것을 구 선교사에게 미리 부탁해놓은 것이다. 
 
▲ 수도권 식구들과 제주도에 사는 모갑경 목사집 망문 / 박형규 목사 내외, 이규상, 허병섭, 김동완, 모갑경 등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이 사건의 내용을 폭로하고, 다시 서대문경찰서로 돌아갔다. 경찰들은 그를 보고 굉장히 좋아하면서 반가워했다고 한다. 이후 탈출하여 기자회견을 한 사실에 대한 심문을 받을 때 그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하였지만, 제대로 된 녹음테이프와 호소문 세 장이 더 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수사관들은 호소문 한 장을 입수한 뒤 구 선교사에게서 녹음테이프를 압수했다. 그러나 테이프에서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자, 수사관들은 “가짜 뉴스가 아니냐?”라며 의심했다. 하지만 이철용 간사는 “그럴 리가 없다. 나는 녹음기 조작법을 잘 모른다. 아마 녹음이 안 된 모양이다.”라고 진술했고, 그의 짐작대로 수사관들은 ‘녹음기 조작법 미숙으로 녹음이 안 됐음. 호소문 모두 회수했음.’으로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이철용 간사의 폭로와 이와 같은 영리하고 지혜로운 행동이 있었기에 가족들과 모든 교회기관은 우리가 장기 구금되어 조사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 달여 가량 구금되어 있으면서 모짐 고통을 당한 사실은 외부로 전혀 알리지 않았다. 

이 일이 알려진 뒤 각 기관에서 기도회와 진정서, 건의문, 성명서 등으로 확인을 하고, 도움을 호소해 더 큰 불행한 일없이 잘 마무리될 수 있었다. 이철용 간사의 용단이 거대한 폭풍우를 막은 것이다. 이철용 간사가 경찰서를 탈출하여 작성한 호소문의 일부를 소개해본다. 
 
1976년 5월 25일 아침 8시 30분쯤 느닷없이 들이닥친 3명의 기관원으로부터 집에서 연행되어 김경남 씨와 지프차에 실려 어디로 가는 줄 모른 채 실려가 도착하여 보니 서대문경찰서 3층에 자리 잡은 정보2과 대공계 사무실이었다. 

하필이면 간첩 잡는 대공계에 무슨 영문으로 연행됐는지 이유도 모른 채 기관원들로부터 “여기에 잡혀오면 무조건 개새끼다.”라는 등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 조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2, 3일 동안은 조사도 하지 않고 엉뚱하게 5월에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기록하라고 했다. 다 쓰고 나니 필적감정을 해보는 거라며 매직잉크와 시험지를 준다. 무어라고 쓰느냐고 물었더니 “김 장군 만세”, “장군이 되는 길은”, “우리 민족이 해야 할 길은”등 이상한 글만 쓰라고 했다. 

김경남이와 저는 이에 응해 써주었다. 다음 조사는 수도권 특수지역 선교위원회에서 공산당 책자와 신문이 나왔으니 보았냐면서 출처를 대라는 것이다. 신문은 <민족시보>, 책은 <세계>라는 것인데, 보여주면서 문책하여 본 사실이 없다고 하자 3일 정도 조사하더니 혐의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조사가 끝났다.(중략)

끝으로 박형규 목사가 사상이 이상한 사람이며, 박형규 목사가 노트에다 기재한 것이 불온사상인 공산당 글을 썼으며,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에서 사용되는 용어는 순전히 공산당들이 쓰는 용어다, 하면서 박형규 목사가 쓴 노트를 본 사실이 있느냐고 묻는다. 

이렇게 14일 동안 조사를 받고 제가 경찰서에서 도망했던 것입니다. 형무소에 가는 것이 무서워서 탈출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수도권 특수지역선교위원회가 당하고 있는 엄청난 사건에 대비하여확실한 것을 밝히고 떳떳하게 내 발로 걸어 들어가겠습니다. 

숭고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가난하고 힘없는 소외된 자에게 목숨을 전하여 용기와 힘을 주어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순수한 선교사업을 당치도 않는 공산당 조시형이라는 인물에게 결부시켜 공산당을 만들려고 하는 엄청난 이 사건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맹세하며 절대적으로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 선교사업이 공산당인 불법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밝힙니다. 

1976년 6월 8일 이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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