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공몰이에 나선 유신 독재정권 (44회)
  제8장 유신체제에 반기를 들다2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보면 많은 일이 후회로 남는다. 피치 못해, 아니면 시절을 잘못 만나 어렵게 된 사람과의 관계도 그러하다. 그렇지만 이미 시간은 지났고, 사람들은 떠났다. 나는 다만 그 일들을 기억하며 반성할 뿐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께 ‘용서해주십시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나중에 사건을 담당했던 곽동헌 판사도 정보기관으로부터 심한 괴롭힘을 당했다고 들었다. 정보기관에서 왜 이 사건에 개입했는지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 인혁당사건에 가톨릭 쪽이 개입하고 있으니, 개신교에서도 개입할까봐 김관석 목사나 뱍형규 목사, 또 우리 같은 사람들을 구속한 게 아닌가 싶다는 분석을 한 논문도 있다. 

우리를 구속하면 기독교 운동이 큰 타격을 받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김관석 목사는 종로5가에서 모든 운동의 중심추 역할을 했다. 나도 조직훈련을 받았지만 그분이야말로 종로5가의 조직가였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지시하는 법도 없고, 그냥 웃으면서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일이 되게 만드는 분이었다. 

말씀을 들으면 듣는 사람이 행동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김관석 목사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정보기관에서는 할 수만 있다면 그의 발을 묶어 놓고 싶었을 것이다. 

박형규 목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언제나 빈민, 노동자 곁에 있었다. 본인이 그 일과 관계가 있든 없든 말이다. 억눌린 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 그냥 무조건 찾아갔다. 선교자금을 경험하며, 나는 그들이 이처럼 중요하기에 정보기관에서 묶어놓으려고 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선교자금사건에서 박형규 목사는 10개월, 나는 8개월, 김관석 조승혁 목사는 각각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김관석 목사는 “이 재판은 의미 없는 재판이다.”라고 하며 항소하지 않고, 9월 17일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조승혁 목사와 나는 12월 23일 2심이 끝났는데, 이미 형기가 끝난 터라 만기출소해서 나왔고, 박형규 목사는 1976년 12월 14일에 만기출소 했다. 

이 사건은 1987년 제도적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무죄로 선고됐다. 나는 이 사실을 2014년 나와 관계된 모든 사건을 재심 청구했을 때에서야 알게 되었다. 무죄가 선고되었음을 통보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죄선고를 받고 6개월 이내에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해야 하는데, 너무 늦게 아는 바람에 할 수 없었다. 

선교자금에 횡령이란 죄를 뒤집어씌워 사회 선교에 치명타를 가하고자 한 박정희 정권은 기독교계의 반발만 일으켰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북한과 대립하고 있는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이용하여 용공몰이에 나섰다. 

그 타깃은 수도권의 박형규 목사였다. 이는 기독교계 주요인물인 박형규 목사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수도권을 와해시키고 더 나아가 기독교 사회선교를 길들이기 위한 전략이었다. 

박 정권은 홍지영이란 자가 집필한 것으로 보이는 <한국 기독교와 공산주의>와 교회장로이자 서울시경 제2 부국장인 김재국의 <한국기독교계의 이해>라는 책자를 수사기관이나 정보기관 등에 배포함으로써 사회선교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릇된 인식을 갖게 하려고 노력했다. 
 
▲ 수도권선교자금사건 법정에서 / 오른쪽부터 권호경, 조승혁, 김관석, 박형규

1976년 5월 6일 석가탄신일을 전후하여 “부처님을 믿지 마라.” “민족의 문제는 김OO 장군이 해결한다.”라는 내용의 유인물이 뿌려졌다. 수사당국은 이 불온문서의 출처를 추적하던 중 수도권 실무자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 불온문서는 구실에 불과했다. 곧 수도권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시작됐다. 

수도권은 판자촌 지역에 계속 철거되자 동대문구 이문3동 판자촌 뚝방 지대에 있던 수도권 사무실이 있는 집을 팔려고 내놓았다. 이 집에는 방이 5개 있었는데, 하나는 사무실로 쓰고 나머지는 실무자 김경남, 황인숙과 그 가족, 나머지는 실무자 이철용과 그 가족이 쓰고 있었다. 그런데 이집을 복덕방 주인과 손님으로 가장한 기관원들이 여러차례 방문하여 살펴보고 갔다. 

5월 25일 오전 8시, 3명의 기관원들이 들이닥쳐 이철용과 김경남을 서대문경찰서로 연행한 뒤 오후에는 황인숙마저 연행해갔다. 그 뒤로 이규상 목사, 박형규 목사, 허병섭 목사 등을 연행해갔다. 나 역시 박형규 목사가 연행되던 6월 5일 오전 7시에 6명의 형사가 집을 급습하여 연행되었다. 

그 전에도 형사들이 불시로 찾아올 때가 많았다. 그들은 주로 새벽이나 아침 일찍 왔는데, 그러한 일로 가족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영장도 없이 마구잡이로 집안에 들어와 소동을 피우고 가니 새벽에 들려오는 구두소리만 들어도 긴장이 될 지경이었다. 

그 뒤로도 허병섭, 김동완, 모갑경 목사 등의 집을 수색하여 모든 자료를 압수해갔다. 내가 잡혀간 사이 우리 집도 가택수색을 하여 각종 책과 자료를 가지고 갔다. 나는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갔는데, 그곳은 남산에 있는 한 빌딩 안에 있었다. 안기부가 쓰던 대공분실은 내가 잡혀갈 즈음에는 한동안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사용되었다. 

나는 선교자금사건으로 12월 23일 만기출소한 뒤 6개월 여 만에 또 잡혀온 것이고, 박형규 목사는 1976년 2월 출소한 뒤 4개월 만에 잡혀온 것이었다. 

수도권의 실무자들을 먼저 서대문 경찰서로 데리고 간 것은 이 사건을 소위 용공사건으로 볼 수 있는가 알아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그런 밑그림에 자신이 있는 상황에서 나나 박형규 목사를 연행한 것으로 보인다. 

1976년 5월 말부터 7월초까지 수도권 실무자들을 시작으로 십수 명에 달하는 도시빈민선교 관계자들과 그 일에 관계된 주민들이 장기 구금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거나 연행이 되었다. 

연행된 수도권 실무자들을 대상으로 처음에는 <민족시보>, <세계>와 같은 일본 신문, 잡지의 입수경위나 <의식화와 해방>, <ZOTO 지역사회 조직위원회의 연혁과 활동>같은 자료에 대한 소감을 캐묻는 등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점차 박형규 목사를 옭아맬 수 있는 자료를 찾고 ‘박형규는 빨갱이다’라는 자신들의 결론을 실무자들에게 강요하고 주입시키려 했다. 
 
그들은 조사하는 과정에서 회유와 협박을 번갈아 했는데, 이철용에게는 ‘박형규 목사가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인정하면 신평화시장 입주권 두개를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했다. 당시는 신평화시장을 지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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