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조치1호 사건으로 징역 17년을 선고받다 (41회)
  제8장 유신체제에 반기를 들다2

2월 28일 잡혀간 나에게 중앙정보부 수사관이 조사한 내용은 ‘2차 행동을 나도 같이 준비했고, 그에 필요한 돈을 모두 내가 주었다.’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아무 근거도 없이 예비검속에 걸려든 것이었다. 수사관들은 나에게 종이 한 장을 주면서 한 달 동안 한 일을 모두 쓰라고 했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녔다.”라고 말했다. 

나를 미행한 기관원들이 있으니 지난 한달 간 내가 무엇을 했는지는 잘 알 터였다. 수사관들도 내가 안 돼 보였는지 별로 물어보지 않았다. 시간이 좀 지난 후에 나에 대한 조사가 다시 이뤄졌다. 

“김동완에게 유인물을 만들고, 데모하라고 시키지 않았느냐?”
“아니, 김동완 목사가 내 말을 들은 사람이냐?”

나는 그냥 버티고 있었다. 그러자 수사관이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했다. 

“아무리 버텨봤자 못 나간다. 김동완 목사가 수도권 직원이니 같이 했다고 하고 쉽게 끝내자.”

이후 재판이 진행됐는데, 이때 나는 내란예비음모사건 때 나를 담당한 문호철 검사를 다시 만났다. 문 검사는 중앙정보부 수사 담당검사로 자리를 옮겨와 있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씩 웃으면서 “다음에는 나랑 협의해서 하자고 하지 않았냐. 근데 왜 또 혼자 들어왔느냐?”라고 물었다. 
 
문 검사는 나를 조사해도 별로 나올게 없다고 판단했는지 군법회의로 넘겨버렸다. 그리하여 김동완 목사 등과 같이 재판을 받았는데, 김 목사는 15년, 나는 내란예비음모로 받은 2년형을 합쳐서 17년을 선고 받았다. 학생 박상희는 징역 10년, 나중에 감옥에서 나의 요가 선생이 된 김용상과 한신대생 박주환은 각각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다. 이미경, 차옥승, 김매자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 조선일보 (1974. 4.30.)    
나는 서울구치소 독방에 있었는데, 한 달이 채 못 되어 긴급조치로 사람들이 한꺼번에 많이 들어오자 일반 범법자들과 합방을 시켰다. 한방에 많은 사람들이 생활하는 것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잘 때는 상대방 발을 안고 자야 할 정도였다. 게다가 잡범들이 하루 종일 도둑질에 관한 얘기만 하는 통에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있다가 다행히 안양교도소로 이감되었다. 하지만 안양교도소에서도 30여명과 한방에서 지내야 했다. 이해학, 인명진, 김동완 목사도 그곳에 같이 있었다. 기독교 쪽 사람들만이 아니라 백기완 선생도 있었다. 합방을 하는 동안 나는 같이 산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서로 불편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는 것, 먹는 것조차 예민해졌다. 

그런데 안양교도소에서 나는 윤필용을 만났다. 내란예비음모사건 때 수사관들이 그렇게 우리와 관련을 지으려고 한 그 윤필용을 그제여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윤필용은 밖에서 정구를 치고 있었다.

안양교도소에 오고 나서 나는 왜 우리가 꼼짝달싹도 못했는지, 왜 기관원들이 그렇게 따라다녔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2차에 투옥된 목사의 교인들과 현장 주민들을 동원할 수 없었던 이유도 알게 되었다. 이해학 목사로부터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이해학 목사가 1차 행동으로 구속되어 들어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누가 주범인가’를 두고 김진홍 목사와 의견이 일치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해학 목사는 1차 행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김진홍 목사를 만났는데, 김 목사가 잘 설득이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우리가 1차, 2차, 3차로 나누어 행동한다는 것과 누가 그 일을 주도했는지를 말해주었다고 한다. 설명을 듣고 나서야 김 목사는 이 일에 같이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수사과정에서 김 목사가 기관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털어놓으면서 자신이 모든 계획을 한 주범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리더십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기관원들 입장에서는 모든 계획을 알고 있으니 당연히 김 목사를 주범으로 여겼다. 그렇게 해서 주범이 바뀌게 되었고, 나도 들어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 김 목사가 3차 행동 책임자가 나임을 기관원들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나는 기관원들이 왜 그리 나를 따라다녔는지 알 수 있었다. 

참 믿지 못할 이야기에 어이가 없었다. 나는 “그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사실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줘야지.” 하면서 허탈해했다. 극한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나는 신경이 곤두선 채로 몇 달을 그곳에서 보냈다. 

몸이 아프고 힘드니 가족들 생각이 절로 났다. 그럴 때 딸 선인이가 보내준 편지는 힘든 수강생활에서도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아빠, 읽어보세요.
아빠, 안녕하세요? 아빠가 보낸 편지 잘 읽어보았어요. 잘못 난 이빨 학교에서 빼었어요. 아빠는 언제 집에 돌아와요? 나는 아빠가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요즘엔 서늘해서 공부도 참 잘되고 있어요. 주표는 시골 고모가 와여 데려갔어요. 엄마도 학교에 잘 나가고 있어요. 우리 동네에서 우리 집이 제일 헐었는데, 집수리도 안 해요. 왜 안하냐하면 아빠가 안 와서 안 해요. 엄마 혼자 못한대요. 그럼 몸 건강이 안녕히 계세요. 

1974년 9월 13일 선인 올림

아빠 읽어보세요.
아빠, 안녕하세요? 아빠한테 보내려고 닭털 이불을 사서(박형규 목사) 사모님이 가지고 갔었는데, 안 받는다고 해서 도로 가져왔어요. 또 돈은 양장점 아줌마(이규상 목사의 누나)가 넣을 거에요. 책은 사모님한테 맡겼어요. 

엄마가 그러는데, 자꾸 금식하지 말고 얌전히 기도만 하고, 또 공부만 열심히 하시래요. 그러면 박사가 된대요. 저는 10월 8일날 소풍을 가요. 저는 동네 성암교회에 다녀요. 아빠가 보낸 편지는 아직 안 왔어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1974년 10월 6일 선인 올림

아빠에게.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오늘 아빠한테 갈 때 지하철을 처음 타보았는데 참 좋아요. 아침에 일어나면은 날씨가 추운가 밖에 나가봐요. 왜냐하면 아빠가 추울까 봐요. 아빠 보러 갈 때 밖에서 참 많이 기다렸어요. 참 지겨워요. 엄마가 옷 찾으러 가면은 맨날 지겹게 기다린대요. ‘

설날에는 손학규 아저씨가 오셔서 세배를 했더니 세뱃돈 500원짜리 주셔서 나는 내복을 사 입고 주표는 구두를 샀어요. 또 이미경 언니는 예쁜 인형을 선물로 주셨어요. 또 김병현 아저씨는 귤을 사오셔서 같이 먹었어요. 아빠한테 가지고 가고 싶었어요. 또 현영학 선생님도 귤을 사오셨어ㅛ.

엄마가 냉장고를 사고 아빠한테 야단맞을까봐 맨날 걱정을 했어요. 우리 친구네 집에 가면은 냉장고, 전화가 다 있어서 내가 사라고 막 졸랐어요. 우리도 부자가 돼요. 주표는 동네 아저씨들한테 미국 가서 아빠보고 왔다고 자랑했어요. 주표는 아무것도 몰라요. 거짓말이 탄로 나겠어요. 옆방 아줌마가 이상하게 생각하겠어요. 팔이 아파서 끝내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1975년 1월 8일 선인 올림

 
  유신체제의 긴급조치 발동 (40회)
  장준하 선생과의 합방 생활 (4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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