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체제의 긴급조치 발동 (40회)
  제8장 유신체제에 반기를 들다2

긴급조치가 발동되자 나는 밤새도록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아침에 회의를 소집했다. 수도권 실무자들을 모두 부르면 조직에 해를 끼칠 수 있어서 다 부르지는 않았다. 

우리는 긴급조치가 발동한 다음 날인 1월 9일 오전 8시에 서울제일교회 안에 있는 수도권 사무실로 모였다. 참석자는 나를 비롯해 김동완, 이해학, 허병섭, 이규상이었다. 

이날의 회의 주제는 ‘어떻게 긴급조치를 철회 시킬 수 있을까’였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어 보였다. 그래도 나는 교회가 국민들과 같이 울고 웃으며, 아프면 그 아픔에 동참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날 모인 실무자들도 다 같은 마음이었다. 

회의를 통해 세 팀으로 나누어 3차에 걸쳐 행동하는 전략을 짰다. 1차는 이해학 목사(당시 전도사)가 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목회자들을 모아서 KNCC총무실에 “긴급조치 즉각 해제하라!”라는 구호를 붙인 후 긴급조치 선포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이를 언론기관에 알리는 것이었다. 이에 이해학 목사는 빈민선교, 산업선교를 하는 목사들과 의식 있는 목사들을 모아서 이를 행동에 옮기기로 했다. 

2차는 김동완 목사가 1차 시위로 구속된 교역자가 속한 교회와 교인들을 중심으로 긴급조치 반대분위기를 조성하고, 언론에 구속 사유와 구속된 이들이 요구한 ‘긴급조치 철회’의 내용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계 지도자들과 기독학생들을 조직하여 투쟁을 최대한 확대하기로 했다. 

3차 행동을 맡은 나는 모든 의식 있는 목사, 신부 등과 함께 마지막으로 긴급조치 해제를 선언하고 ‘1차, 2차로 구속된 이들을 석방하고, 긴급조치를 해제하라.’라는 내용으로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대형집회를 준비하기로 했다. 나는 내란 예비음모사건으로 석방된 지 3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지막 행동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러한 계획을 세우고 난 뒤 이해학 목사는 1월 17일 이 같은 뜻에 동참하는 김경락 목사, 김진홍 목사(당시 전도사), 이규상 목사(당시 전도사), 박윤수 목사(당시 전도사) 등과 함께 1차 계획을 실행했다. 이날 발표된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선하신 명에 따라 우리 기독교 성직자 일동은 오늘의 조국이 처한 현실에 대하여 순교자적 각오로 다음과 같이 우리의 신앙을 고백한다. 

1. 금번 대통령의 1.8비상조치는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이므로 이는 즉시 철회되어야 한다. 
2. 개헌논의는 민의에 따라 자유롭게 전개되어야 한다. 
3. 정부는 유신체제를 폐지하고 민주질서를 회복할 것을 촉구한다. 

1974년 1월 17일
한국기독교성직자 일동

이 날 모인 교육자들은 기도회가 끝난 뒤 기독교 회관 안에 있는 여러 기관의 사무실을 방문하여 개헌청원서명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접하고 출동한 수사기관에 의해 동대문경찰서로 모두 연행되고 말았다. 

이들은 다시 정식 구속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들 교역자 외에도 개헌청원에 서명한 김성일, 홍길복, 임신영, 인명진, 박창빈 등이 이 사건과 관련하여 연행되었는데, 이중 인명진 목사만 구속되었다. 
 
▲ 동아일보 (1974. 1.6.)

그런데 2차 계획에 따라 구속된 목사들이 속한 교회의 교우들이나 빈민현장 사람들을 동원하기가 힘들어졌다. 기관원들이 김동완 목사를 계속 따라 붙는데다 각 지역대표들이 김 목사의 제안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유인물은 만들기로 해서 김동완 목사는 이화여대와 한신대 학생들인 이미경, 차옥승, 김매자, 박상희, 박주환 등과 박상희 목사의 친구인 김용상 등과 함께 유인물을 만들었다. 한편 김동완 목사는 교인들을 데리고 약수동 형제교회에서 장충체육관까지 행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2차 팀도 유인물을 만들고 시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모두 구속되었다.  

기관원들의 방해로 실패한3차계획 

1, 2차 계획이 행동으로 옮겨지고 있을 때 나는 3차 행동을 하기위해 사람들을 만나러 지방으로 갔다. 그러나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광주에서 강신석, 윤기석 목사, 부산에서는 최성묵 목사 등을 만나서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데 나를 뒤따라 다니는 기관원들 때문에 만남이 불가능했다. 내가 타는 버스마다 어떻게 알았는지 기관원들이 타고 있었다.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광주의 지도자들을 만나는 것을 포기하고, 곧바로 조아라 장로를 찾아갔다. 당시 YMCA광주 총무이던 조 장로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사람에게만 말해서는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나는 조 장로에게 “제가 쫓기고 있으니 그냥 하룻밤만 재워주세요.”라고 하고는 하룻밤 신세만 지고 이튿날 새벽 일찍 부산으로 떠났다.

하지만 부산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나를 미행하는 기관원들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떼어놓려고 머리를 써도 기관원들은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하는 수 없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부산을 돌아다니기만 했다. 내가 그냥 놀러 온 것처럼 보이게 더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부산에서 하룻밤을 여관에서 자고, 빈손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안에도 기관원들이 타고 있었다. 

감옥에 들어간 이들을 생각하니 자꾸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서울로 돌아온 다음날 새벽, 기관원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잡혀가서 보니 이미 김동완 목사를 비롯해 학생들이 여러 명 구속되어 조사를 받고 있었다. 김동완 목사가 잡혀간 것은 이해학 목사 등이 1차에 발표한 시국선언문과 성직자 구속 경위서를 전국 교회에 보내려다 당국의 우편물 검열에 걸렸기 때문이다. 

이때 이들이 보낸 <개헌청원운동 성직자 구속사건 경위서>의 앞 문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항상 힘없고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정의의 승리를 입증해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바를 자유롭게 말하고 듣는 것은 민주국가 국민의 당연한 권리요, 하나님이 부여한 천부적인 권리입니다. 그리하여 현재 우리나라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유신독재헌법의 폐지임을 사회 여러 인사들이 천명하시었고, 그와 함께 개헌운동을 전개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민의를 충분히 받아들이겠다.”라는 김 총리의 말이 있은 지 일주일이 채 못 되어서 대통령은 ‘1.8긴급조치’를 선언하여 모든 개헌논의를 중단하겠다는 결심을 발표하였습니다. 이에 이 땅의 국민들은 15년의 징역살이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일체 개헌에 대하여 말하지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침묵을 강요당하는 현실 속에서도 예언자적 양심과 순교자적 용기를 가지고 분연히 “개헌논의는 민의에 따라 자유롭게 전개되어야 한다.”라고 외치면서 일어난 젊은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국내 보도기관을 통해서는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진상이 왜곡되어 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되어 여기에 그 내용을 알리고자 합니다.

 
  보석 석방 (39회)
  긴급조치1호 사건으로 징역 17년을 선고받다 (4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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