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조사와 재판 (38회)
  제7장 유신체제에 반기를 들다1

7월 6일, 당국은 남산부활절연합예배사건을 내란예비음모사건으로 발표했다. 교계는 당국의 발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감지했다. KNCC 임원회는 이 사건을 논의한 후 회장단이 법무부장관을 면담하기로 하고, 다른 한편 KNCC 실행위원회를 소집하였다. 

7월 20일에 열린 실행위원회에서 김관석 총무는 내란예비음모사건의 경과와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이하 WCC)를 중심으로 한 세계교회들의 관심과 지원내용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각 교단 총무와 변호사 등으로 조성된 조사위원회를 꾸리기고 했다. 

박형규 목사와 내가 소속된 기장 교단에서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그 이후로 한국교회여성교회연합회는 법무부 장관 앞으로, 기장 여신도회전국연합회 등은 대통령과 국무총리 앞으로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들 단체는 또한 구속자들의 가족을 돕는 운동을 펴나가기로 했다.

우리가 조사를 받는 동안 당국은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며칠 씩 집에 들어가지 않을 때도 자주 있던 터라 우리집에서는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란예비음모사건의 주동자로 발표가 되었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서울제일교회 신도 140여명은 박형규 목사와 나에 대한 재판부의 선처를 바라는 진정서를 작성하여 담당판사에게 보냈다. 종고등부 학생들은 철야기도회를 열기도 했다.   

검찰은 우리를 ‘내란예비음모’ 죄목으로 기소했다. 마침내 첫 재판일인 8월 21일이 되었다. 재판정에는 세간의 관심이 많아서인지 많은 사람이 방청을 왔다. 

재판정에서 문호철 검사가 내게 물었다. 

“검찰조사를 받았지요?”

방청석을 보니 함석헌 선생이나 안병무 선생 등 아는 얼굴이 많이 보였다. 나는 죄송하기도 해서 일부러 큰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어느 호텔에서 술에 취해 속옷바람으로 신문을 보며 앉아 있던 험상궂은 사람에게 취조를 받은 적은 있으나 대한민국 검사에게는 조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검사의 표정이 어떠했는지는 보지는 않았다. 나는 내 말만 하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방청석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판사가 더는 재판이 진행되지 않겠다고 판단했는지 재판을 연기했다. 

재판이 끝나고 문호철 검사가 나를 불러 제발 속옷 바람에 술에 취해 있었다고는 말은 빼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러면서 “협상을 하자. 어쩔 수 없지 않느냐, 나도 살고, 당신도 살려면 재판이 빨리 끝나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난 내란예비란 것도 모르고, 한 적도 없다. 그러니 그 부분을 싹 빼라.”
이렇게 입씨름만 하다가 검사실을 나왔다. 
 
▲ 1973년 부활절연합예배 사건으로 재판받는 모습 / 왼쪽부터 남삼우, 박형규, 권호경, 이종란

2차 공판이 열린 8월 28일에는 방청객들이 공판에 앞서 법원 가까이에 있는 젠센기념관에 모여 구속자들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뒤로 재판에 앞서 기도회를 갖는 것은 하나의 의례처럼 되었다. 

수감되어 있으면서 재판을 받는 것은 한편으로는 나의 의지를 다 잡는데 도움이 되었다.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는 검사를 상대하는 것 뿐이니 취조실에서 수사관들에게 취조를 당하거나 고문을 당하는 일에 비하면 그야말로 살맛나는 시간이었다. 박형규 목사가 관련되어 있어서인지 재판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기도와 응원으로 힘을 보태주었다. 그러하니 재판을 받는 일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재판을 받는 동안 좀 우스운 일도 있었다. 재판에 앞서 우리는 ‘비들기장’이라는 곳에 들어가 각자 따로 있다가 시간이 되면 재판정으로 나갔다. 한번은 비들기장에서 나와 재판정으로 들어서는데, 남삼우 씨가 재빨리 내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항아리 마담이 와 있는데요?”
“누가 왔다고요?”
“항아리 마담이 밀린 술값을 받으려고 여기까지 왔나 봐요.”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씩 웃고 말았다. ‘항아리’는 청계천에 있는 술집 이름이었다. 그곳은 밥도 팔고 술도 파는 곳인데, 주인인 최 여사가 일식집에서 마담으로 일하던 사람이어서 우리는 최 여사를 최 마담이라고 불렀다. 최 마담은 돈 없는 우리가 찾아가도 늘 따뜻한 밥이나 맛있는 안주를 내놓곤 했다. 

항아리는 박형규 목사와 현영학 교수의 단골집인데다가 민주화운동을 하는 교수들이나 변호사들을 수시로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수도권사람들이나 학생운동을 하는 젊은이들도 항아리를 자주 드나들었다. 나 역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그곳을 찾아갔다. 최 마담과 오랜 신뢰관계를 쌓은 덕에 우리는 수시로 외상값을 달아놓곤 했다. 

남삼우 씨도 나 때문에 그곳을 알게 되었는데, 내가 없어도 동지들과 그 집을 가끔씩 찾아가 외상으로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 그런데 재판정 방청석에 최 마담이 앉아 있으니 술값을 받으러 왔다고 지레 짐작한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최 마담이 왜 재판정까지 왔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남삼우 씨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 마세요. 최 마담은 뱍형규 목사님 보러 온 거니까.”

포승줄에 묶여 재판정으로 들어가는 그 짧은 시간에도 이런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재밌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그만큼 우리는 재판을 받는 동안 마음이 편해지고 있었다. 더욱이 이 사건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고,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에 힘이 났다. 

재판이 열릴 때마다 함석헌 선생이나 법정스님, 문동환, 안병무 교수를 비롯하여 기독교계의 유명 목사들이나 젋은 기독학생들이 찾아와주어서 우리로서는 내심 고무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2차 공판이 열린 재판정에서 문호철 검사가 내게 한 말을 폭로했다. 협상을 하자고 한 것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해버린 것이다. 재판이 끝나자 문 검사는 나를 다시 검사실로 불렀다. 그는 검사실로 들어서는 나를 보고 웃더니 한마디 내뱉었다. 

“어떡할래요?”

문 검사의 질문에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다만 문 검사의 웃음에 화답하는 의미로 그냥 씩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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