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재정비 답십리센터_1 (31회)
  제6장 도시빈민은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싶었으나, 10월 유신으로 모든 활동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1973년 4월부터 진산전 씨와 주민들은 다시 이 지역의 진료소 설립을 추진하였지만, 부활절연합예배사건으로 나와 박형규 목사가 구속되고, 수도권의 실무자들과 진산전 씨가 조사를 받게 되면서 다시 중단되었다. 

이 외에도 수도권은 송정동 뚝방에 활빈교회를 세워 구호활동을 하던 김진호 목사와 관계를 맺고 주민 조직활동을 했다. 남대문 시장에도 김동완 목사가 실무자로 들어갔다. 그는 합숙소를 얻어 막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직접 장사도 하고, 날품팔이도 하면서 남대문시장의 실태를 조사했다. 

또한 시장 상인들로 구성된 속회를 조직하고 <새마음교실>이라는 야학을 개설하였으며, 금요일마다 노동자들의 모임도 열었다. 하지만 10월 유신 직후에는 합숙하던 동료가 이러한 활동을 의심하는 일이 벌어졌다. 김동완 목사의 주민조직활동을 반(反)국가 활동으로 본 것이다. 

그 일로 김 목사는 합숙소에서 나오게 되었지만, 그 후로도 남대문시장과 계속 연결고리를 갖고 있었다. 한번 수도권은 1973년 1월 13일에 이해학 전도사를 성남주민교회로 파송했다. 이 전도사는 주민병원설립을 계속 추진하였고, 진료사업을 계속하기 위해 <주민의료협동조합>을 창립하였다. 

수도권은 주로 주민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먼저 파악했다. 지역실태를 조사하는 것은 단순한 현장조사가 아니었다. 현장에 같이 살면서 지역주민이 겪는 문제와 경험을 같이 겪고 느꼈다. 다만 활동가들은 거기에 더해 그 문제를 분석했다. 주민 각자가 개별적으로 느끼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개별적 문제에서 출발하여 주민 모두에게 당면한 과제가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지역에 들어간 활동가들은 주민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사실 그럴 힘도 없었다. 지역주민들의 문제는 오로지 주민 스스로 행동할 때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활동가들은 이러한 주민들 곁에서 그들이 힘을 받을 수 있도록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활동가들의 일은 주민들이 힘을 받아 일어설 수 있는 요구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수도권이 출발한 당시인 1972년에는 보건소나 병원 설립이 주요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많은 주민들의 관심사였다. 또한 활동가나 주민지도자가 활동하는데 있어 주민들의 거부감이나 관계당국의 경계를 완화시킬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게다가 의료시설을 설립하는 등의 활동은 외부의 자원이 꼭 필요한 일이다. 의사나 재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독지가 등을 조직하고 이들은 동원하는 일은 비교적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 1970년대 청계천 판자촌 모습

수도권 재정비 답십리센터

10월 유신 이후 우리는 새로운 선교전략을 고민해야 했다. 그동안 분산된 활동을 좀 더 집중해서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필리핀 톤도지역에서는 <ZOTO>라는 이름으로 톤도 공동체를 이루어 집단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보며 같이 살면서 활동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1972년 11월부터 김동완, 이규상, 전용환, 김혜경, 김영일, 허병섭, 모갑경, 이철용, 황인숙, 서기태, 이해학, 정진영, 손학규, 유문자, 김진홍 등의 활동가들과 청계천 지역인 답십리동에서 집중적인 활동을 펴나갔다. 

먼저 동대문구 답십리 4동에 판잣집을 전세 내어 다 같이 합숙하며 지내기로 했다. 이곳은 이후 <답십리센터>로 불리게 된다. 답십리센터는 활동가들의 근거지였으며, 목회자나 신학생, 학생들을 빈민지역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했다.

실무자들은 청계천 지역을 4개 구역으로 나누어 담당하기로 했다. 제1지구는 이규상, 제2지구는 송창영, 제3지구는 이규상과 김혜경, 제4지구는 손학규가 맡았다. 김동완은 전체 지역을 총괄하였고, 나는 훈련총무를 맡았다. 

답십리센터에서도 우리는 지역의 실태조사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10월 유신 이후 경직된 사회분위기 때문에 실태조사는 좀 더 전략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우리는 지역 내 아동의 교육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호별조사를 한다는 점을 내세웠다, 아동의 교육환경을 조사하는 것에는 누구도 거부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사과정에서 이상한 점이 발견됐다. 의무교육을 맡아야 할 많은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 길에서 놀고 있다는 것이었다. 육성회비를 낼 돈이 없어서 학교에  가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김화곤 훈련실무자가 지역아이들의 육성회비 납부실태를 조사했다. 마침 이 지역에 서울시 교육위원회 직원이 살고 있어서 이 직원의 도움을 받아 육성회비에 관한 시교육위원회의 규칙을 입수하여 검토해보았다. 

그리고 여기서 어느 학교나 국민학생은 육성회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답국민학교에 가서 알아보니 모든 학생이 똑같이 육성회비를 내고 있었다. 학교 측에 항의를 하자 교사 측에서는 “우리도 어쩔 수 없다. 아이들이 옷 입는 것을 보고 대충 육성회비를 내게 한다.”라고 대답했다. 

물론 청계천 지역에도 잘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차를 몇 대씩 가지고 있는 집도 있었고, 판자촌 집을 여러 개 사서 세를 놓는 집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은 극히 소수였다. 그런데도 모두 똑같이 육성회비를 내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학부모님들에게 알렸고, 30여명의 학생들은 <육성회비대책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들 중 몇 명이 대표로 신답초등학교 교장을 찾아갔다. 그러자 교장은 다시 조사하여 다음 학기부터는 육성회비를 감면하겠다고 약속했다. 교장은 그렇지만 자신이 모든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학부모들은 다시 서울시교육위원회에 진정서를 냈다. 이 일이 알려지자 더 많은 학부모들이 학교를 찾아가 자신들의 생활환경을 알렸다. 결국 진정서를 낸 학부모들은 육성회비를 감면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일을 통해 학부모들은 처음으로 아이들에게 무상으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고, 그것에 대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육성회비를 내지 못할 경우 선생님에게 미안해서 학교에 보내지 않으려고 했다. 의무교육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집집마다 다니면서 조사를 할 때 우리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알아보니 우리가 들어간 청계천 지역에 다섯 가구당 한명씩 정보원이 있었다. 정보기관에서 심어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주민들이 무엇을 하는지 일거수일투족을 정보기관에 보고했다. 반상회를 만들어서 주민들과 회합하는 자리를 갖게 했지만, 반장이 정부로부터 3만원씩 받으며 주민들의 상황을 보고하기로 했다. 

마치 북한처럼 주민이 주민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독재체제 아래에서 주민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려고 하는 것은 북한이나 남한이나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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