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톤도에서 경험한 주민조직_2 (29회)
  제6장 도시빈민은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

그때가 오후 2시였다. 백주 대낮에 그처럼 어이없는 일을 당한 것이다. 황당한 일을 겪기는 했지만, 덕분에 얻은 소득도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리프노와 더욱 가까워진 것이다. 리프노는 그날 이후 내 부탁이라면 토를 달지 않고 잘 들어주었다. 화이트 목사는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리프노와 친해졌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경찰서에서 내가 이름을 댄 홍승면 국장과는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내가 가끔 시내에 나가면 밥을 사주곤 했는데, 그때마다 “필리핀은 다 좋은데 사회 안전망이 문제예요.”라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살고 있는 톤도지역에는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톤도에 사는 동안 여러모로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한번은 김종필 씨가 대통령 특사로 여야 의원들을 대동하고 필리핀 대통령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야당의 박종률 의원이 나를 찾아왔다. 알고 보니 홍승면 국장이 “마닐라 톤도 지역이 우범지대인데도 한국에서 온 전도사가 거기에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박 의원은 승용차 3대와 오토바이를 탄 필리핀 경찰 30여명 등 50명이 넘는 수행원을 거느리고 나를 찾아왔다.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마을 주민들은 그 열배는 넘어보였다. 톤도 지역일대가 떠들썩해진 것이다. 박 의원은 “홍승면 선생 말을 들으니 아주 위험한 지역에 한국 전도사님이 사신다고 해서 찾아왔는데, 이렇게 번거롭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라고 하며 미안해 했다. 

나는 톤도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주민조직을 세울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 의원이 찾아오는 바람에 모든 주민에게 내 신분이 노출되고 말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아무튼 나는 공개적으로 주민을 조직화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무렵 마르코스 정부가 톤도 지역에서 주민들을 내쫓고 거기에 독일 자본으로 항구를 개발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당연히 주민들은 반발하고 나섰다. 톤도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인데다 달리 갈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땅에서 쫓겨나는 것은 최후의 생존권을 빼앗기는 일이었다. 필리핀 정부와 기업들도 이 점을 알고 있었으나 개발에 혈안이 된 그들에게 주민들이 입장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톤도에 가기 전 1970년 11월, 마닐라를 방문 중이던 교황 바오로 6세가 톤도지역을 방문했다. 화이트 목사와 필리핀 교회 지도자들 중에 좋은 의도를 가진 이들이 필리핀의 대표적인 빈민촌 주민들에게 희망을 심어달라고 교황의 바티칸에 호소한 결과였다.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에서 교황의 톤도 방문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교황이 톤도를 방문하자 마닐라 교구의 산토스 추기경을 비롯한 여러 주교도 함께 톤도지역을 찾았다. 당시 교황 바오로 6세는 톤도 지역의 빈민촌을 목격하고 “교회가 이들을 위해 무엇인가 봉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했고, 추기경은 “네, 해야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모든 언론이 “교황과 동행한 산토스 추기경이 톤도를 위해 대답했다’‘라며 이 사실 크게 보도했다. 

그런데 산토스는 전시용으로 자기네들에게 필요한 복지회관만 한두 개 지어놓고는 1년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주민조직운동을 하던 실무자들은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내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제안을 했다. 마닐라에는 필리핀 가톨릭이 소유한 몬테티피다 은행이 있는데, 톤도에서 차로 가면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은행을 움직여 산토스 추기경을 움직여보기로 한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주민조직 훈련 실무자들이 모여 계획을 세웠다. 훈련생 중에는 외국인이 두 명 있었는데, 나와 인도 캘커타에서 온 안델리 센이라는 교사였다. 
 
▲ 톤도 주민자치회의 모습 / 맨 오른쪽이 리프노이다

“먼저 내가 몬테디피다 은행에 가서 15센타불로 예금통장을 만들고, 그 예금통장을 많이 복사한 뒤 각 지역주민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 다음에는 주민 한 사람 당 15센타불 씩을 나눠주고 그들을 버스에 태워 은행에 데려가 통장을 만들게 하자. 버스는 10대 정도 대절하고, 한 버스에 30~40명의 주민들을 태우자. 주민조직과 교육훈련은 내가 통장을 만들어 온 다음에 실시하자.”

계획을 세우긴 했으나 걱정이 되긴 했다. 은행에서 통장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나는 혼자 몬테디피다 은행에 갔다. 은행 창구에 가서 15센타불을 내밀려 예금통장을 만들어달라고 하자 은행 직원이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에 있던 팀장에게 가서 이야기를 하면서 나를 가리켰다. 조금 있으니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 예금통장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통장을 쥐고 뛸 듯이 기뻐하면서 톤도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통장을 많이 복사이 복사한 뒤 주민대표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런 다음 그들에게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알려줬다. 

“외국 사람인 나도 통장을 만들었다.” “당신들은 돈을 저금해본 일이 있느냐?” “버스는 당신들이 살고 있는 동네 OO장소에 대절해놓았다.” “각 지역마다 아침 8시에 만나자.” “그곳에 오면 모든 사람에게 15센타불을 줄 것이다.” "이 돈으로 통장을 만들면 앞으로 계속해서 15센타불을 저금할 수 있게 돈을 나눠주려고 한다." "반드시 몬테디피다 은행에 입금해야 한다." "저금을 계속하면 이자도 생긴다."

이런 식으로 주민대표들에게 이야기를 하니 다들 좋아했다. 나중에 보니 이들은 평생 통장이라는 것을 만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이 적힌 통장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처음에는 돈만 받고 은행에 가지 않겠다는 사람이 있었지만, 버스로 데려갔다 데려 오겠다고 하니 나중에는 모두 가겠다고 했다. 

마침내 약속한 날이 되었다. 아침 9시부터 톤도 주민들이 은행에 몰려들자 은행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입금하는 창구가 두개밖에 되지 않아 나중에는 창구가 일곱 개로 늘어났다.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줄이 줄어들지 않았다. 게다가 글을 모르는 사람까지 많아 통장을 만드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은행원들이 정신없이 일하다 말고 항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많은 인원이 하루 만에 통장을 다 만드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다음날 다시 오기로 하고 일단 철수했다. 다음날 다시 가니 이번에는 은행에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 뒤로 세 번이나 시도했는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은행 앞이 문전성시를 이루자 어디서 들었는지 신문기자들과 방송기자들이 몰려들어 취재하기 시작했다. 저녁 뉴스에서는 그날의 광경이 방송되었다. 그 다음날 신문도 너나 할 것 없이 대서특필했다. 신문을 보니 바르게 보도한 곳도 있고, 불순세력 운운하는 곳도 있었다. 신문과 방송에 보도가 나가자 평소 은행을 찾던 마닐라 주민들이 무서워서 은행에 오지 못했다. “무서운 톤도 사람들이 은행에 있다는 거냐?”라고 하면서 왔던 사람들도 다 가버렸다.

우리 센터의 실무자 중에는 가톨릭교회의 빅츠리시아 수녀, 유성코 신부, 라방 신부 등이 있었다. 가톨릭교회 대표자들이 이들을 찾아나섰으나 모두 피신해버리는 바람에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빅트리시아 수녀가 원장 수녀에게 가게 되었는데, 원장 수녀는 “당신이 원하는 자리는 무엇이든지 해주겠다.”라는 식으로 회유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빅트리시아 수녀는 이런 사실까지 신문과 방송에 전부 공개해버렸다. 

그러자 빅트리시아 수녀에게 다른 제안이 들어왔다. 훈련센터에 있는 빅트리시아 수녀나 유싱코 신부, 라방 신부 중에 누구라도 나와 은행 매니저와 공개토론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빅트리시아 수녀는 “우린 이 문제와 관련해서 아무런 자격이 없다. 공개토론을 하려면 주민대표와 하라.”라고 했다. 그러자 은행 쪽에서 “그렇다면 방송에서 주민대표와 공개 토론을 하자.”라며 제안을 해왔다. 

그런 와중에 긴급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상황이 생겼다. 6개월을 약속하고 왔는데, 3개월만에 떠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톤도지역 주민들의 행동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4월 1일, 나는 감사한 마음을 안고 톤도를 떠났다.

 
  필리핀 톤도에서 경험한 주민조직_1 (28회)
  성남주민교회 (3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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