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톤도에서 경험한 주민조직_1 (28회)
  제6장 도시빈민은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

1972년 1월, 나는 당시 CCA-URM 간사인 오재식 선생의 추천과 화이트 목사의 초청으로 필리핀 마닐라의 빈민촌인 톤도에 가게 되었다 화이트 목사는 한국에서의 주민조직을 마친 뒤 마닐라에서 같은 사역을 하고 있었다. 

화이트 목사가 이처럼 아시아의 주민조직 훈련을 하게 된 배경에는 <악포>(Asia Committee for people's Oraganization, ACPO)가 있었다. 악포는 1971년 가톨릭의 아시아주교회의(FEDERATION OF ASIAN  BISHOPS? CONFERENCES, FABC)와 개신교의, CCA-URM이 협의해서 만든 조직이다. 화이트 목사는 악풍의 지원을 받아 필리핀에서 주민조직훈련을 하고 있었다. 당시 필리핀의 훈련조직은 <페고>(PEGO)라고 불렀다. 

마닐라로 가기 전, 나는 일본 도쿄에 있는 오재식 선생의 집에서 며칠간 머물렀다. 당시 CCA-URM 사무실은 도쿄에 있었다. 오 선생 집에 머물면서 나는 국내 상황과 필리핀 상황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떠나기 전, 오 선생의 부인인 노옥신 여사로부터 셔츠 한 벌을 선물로 받았다. 내가 한국에서부터 입고 온 셔츠는 겨울용 셔츠였다. 필리핀의 더운 날씨에 맞는 옷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이다. 노 여사는 시장에서 옷감을 끊어다가 내게 여름용 셔츠를 만들어주셨다. 나는 그 옷을 입고 1972년 1월 5일 마닐라 톤도에 도착했다. 

바닷가에 인접한 톤도는 케냐의 키베라, 브라질의 파벨라와 함께 세계 3대 빈민촌으로 불렸다. 예전에는 어획량이 풍부하여 먹고살기 좋은 곳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954년부터 마닐라 각지에서 모인 쓰레기가 쌓이면서 척박한 환경이 되었고, 수많은 빈민들이 모여들면서 점차 거대한 빈민촌이 되고 말았다.  

톤도에 도착한 나는 허름한 연립주택 1층에 짐을 풀고 곧바로 톤도 지역주민 조직인 <ZOTO>(Zone One Tondo Organization)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에서는 동료들이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무판자를 잘라 만든 식탁 위에는 밥이 담긴 커다란 그릇과 시래기를 삶아 넣은 카레처럼 생긴 큰 국그릇이 놓여 있었다. 식탁 중앙에는 찜을 한 작은 갈치도 놓여 있었다. 손님이 온다고 해서 특별히 차린 것 같았다. 

그런데 짐을 풀고 오는 동안 온 몸에 땀이 나서 옷이 다 젖어 있었다. 얼굴에서는 땀이 비오듯 줄줄이 흘러 내렸다. 식탁에 둘러앉은 동료들도 내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그날 모인 동료들은 대여섯 명쯤 되었는데,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었다. 그들은 지역주민 대표이거나 ZOTO 직원 혹은 훈련생들이었다. 필리핀에서 있는 동안 나와 함께 할 아우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다 같이 기도를 하고 식사를 하려는데, 이 사람들이 식사는 하지 않고 전부 나만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밥을 날 먹을 수 있을까 염려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 식사를 하는데 용기가 필요했다. 동료들 앞은 물론 내 앞에도 숟가락, 젓가락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밥그릇 옆에 큰 숟가락이 놓여 있어서 나는 그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내 접시에 담고, 그 위에 카레처럼 보이는 멀건 국을 조금 담았다. 작은 갈치는 손으로 잡았다. 멀건 카레국에 만 밥을 오른손으로 뭉쳐먹고, 왼손에 든 갈치는 조금씩 베어 물었다. 손으로 밥을 먹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내가 망설이면 동료들이 곤란해질 것 같아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식사를 했다. 그렇게 허겁지겁 밥을 먹다가 주변을 둘러보니 나만 양손을 밥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다른 사람들은 모둔 한손으로만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갈치를 들고 있던 손을 슬며시 내리고, 한손으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땀방울이 계속 접시로 떨어졌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 ZOTO 사무실

내가 별 내색을 하지 않고 식사를 하자 긴장하듯 보이던 동료들의 표정도 주검은 풀어진 것 같았다. 톤도에 오기 전에 오재식 선생이 “거기서 식사를 할 때 어설프게 포크 찾고, 젓가락 찾지 마라.”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당시 톤도 중심지에는 약 3만세대가 살고 있었는데, 이 지역의, 가장 큰 문제는 치안의 부재였다. 심지어 톤도에 사는 주민들도 밤이 되면 웬만해서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톤도는 수도 마닐라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니다. 그렇지만 마닐라에 있는 리잘공원(Rizal Park)에서 택시를 잡아 톤도로 가자고 하면, 기사 10명 중 3명은 대꾸도 없이 그냥 가버리고, 4명 정도는 “비안합니다. 무서워서 못갑니다.”라며 거절한다. 3명 정도는 겁은 내지만 태워주기는 한다. 나는 일곱 번 정도 거절을 당한 후에 겨우 잡은 택시 안에서 이런 소리를 들었다. 

“손님,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아십니까?”
“네, 알지요.”
“그곳에 살아요?”
“네, 얼마간 살 겁니다. 그런데 왜 그러세요?”

“우리는 거기 무서워서 안갑니다. 손님이 외국사람이라서 할 수 없이 태워준 거예요.” 
"톤도가 그렇게 무서운 곳이예요?“
 
“아휴, 말도 마세요. 거기는 잘못 갔다가는 강도한테 돈 뺐기는 곳이에요. 돈만 뺐기면 다행이지, 죽여서 그냥 바닥에 던져버린대요. 그러면 시신도 못 찾아요. 살인사건이 나도 수사도 안 하고요. 경찰들도 거기는 무서워 할 걸요.”

나는 톤도에서 범죄가 일어나는 광경을 몇 번 목격한 적이 있다. 하지만 사람이 죽었는데도 범인을 잡은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당시 톤도 지역주민 대표의 회장은 트레니였는데, 그녀는 여걸로 불릴 정도로 활동적이었다. 부대표는 깡패조직에 있던 리프노라는 남자였다. 빈민촌이어서 그런지 아무래도 깡패조직에서 좌지우지 하는 일이 많았다. 

나는 주민조직을 하기위해 우선 리프노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리프노는 마을에서 재단사 일을 했다. 나는 매일 ZOTO 사무실이 아니라 리프노의 가게로 놀러갔다.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주거나, 필리핀 맥주인 산미구엘을 사주면서 마냥 죽치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리프노는 먹을 것만 받아 챙길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2주 정도 지나서야 그는 내게 한마디씩 말을 걸기 시작했다. 말을 나누기 시작하자 점점 마음을 여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인가는 웃으면서 내가 입고 온 셔츠가 마음에 든다고 하길래 즉시 벗어주자 무척 좋아했다. 

점차 친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번은 마닐라의 중심부인 마카티(Makati)에 함께 나가게 되었다. 내가 톤도에만 있으니까 가이드가 되어 시내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한 것이었다.  
 
마카티를 돌아다니는데 갑자기 경찰이 우리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달러 있느냐?”고 물었다. 없다고 했더니 경찰이 리프노를 떠밀다시피 하면서 파출소로 데려갔다. 할수 없이 나도 같이 파출소로 갔다. 

파출소에서 경찰이 또 “달러 있으면 내놓으라.”라고 윽박질렀다. 그래서 내가 “달러는 없다. 그런데 왜 그러느냐?”하고 물었다. 그러자 경찰은 리프노를 가리키면서 “이놈, 톤도에서 왔지? 이 놈이 도둑놈일 수 있어서 그런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이 사람은 내 친구이고, 우리 집 옆에 산다.”라고 항의했다. 주춤되던 경찰은 “그래도 안 된다.”라면서 필리핀 말로 무슨 얘기인가를 주고받았다. 분위기를 봐서는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전화기를 좀 빌리겠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
“당신 친구가 어디에 있느냐?”“막사사이빌딩에 있다.”
“거기서 무슨 일을 하느냐?”
“아시아신문재단의 사무국장이다.”

나는 마닐라에 아시아신문재단 일로 와 있는 홍승면 국장의 이름을 댔다. 그제야 경찰은 “당신은 그만 나가라.”라고 했다. 그렇지만 리프노느 도둑이기 때문에 풀어줄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화가 나서 “이 사람은 내 친구이다. 도둑놈이 아니다.”하면서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경찰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리프노를 풀어주면서 함께 나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 조직 (27회)
  필리핀 톤도에서 경험한 주민조직_2 (29회)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