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단을 이끌고 광주 대단지로 가다 (23회)
  제5장 주민조직운동과 도시선교

주민들이 서로 믿고 자주 만나게 되면 더 나은 삶을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개선시킬 대안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주민조직가는 이 과정에서 먼저 주민지도자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뒤 자신들의 문제는 자신들의 손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조직된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어야 한다. 그로 인해 작은 것이라도 쟁취하던 사람들은 점점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이 조직의 힘을 믿고, 그 힘을 사용하여 뭉칠 경우 재정적, 정치적 힘까지 얻을 수 있음으로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 주민조직가의 역할이다. 이렇게 조직을 통하여 훈련된 주민들에 의해 세워진 주민지도자는 조직가가 그 지역을 떠난 뒤에도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요구와 권리 쟁취를 위해 싸울 수 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자치운영연합회의 회장인 진산전 씨는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했다고 할 수 있다. 나중에 이야기 하겠지만 그는 내게 처음으로 징역을 산 부활절연합예배사건과도 직간접적으로 연결이 된다. 그는 당시 국회부의장인 국회의원 김재광의 총무비서였다.  

1970년 4월, 나는 연세대 도시문제연구소 도시선교위원회의 주민조직 훈련을 모두 마쳤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오재식 선생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오 선생은 나에게 학사단 학생들을 데리고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시)로 내려가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처음에는 “전용환에게 가라고 하시지요. 아니면 KSCF 고등학생 담당인 이직형이 가면 될 텐데, 왜 저보고 가라고 하십니까?”라면서 거절했다. 오 선생은 KSCF의 워크캠프 활동으로 성남과 관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내가 서울에서 조민조직훈련을 받았으나 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며 집요하게 설득했다. 박형규 목사도 내가 광주대단지로 가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학사단이 도시지역에 가서 활동하는 것이 중요하고, 좋은 일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오재식 선생은 KSCF 총무(1969-1970)를 맡으며 기독교 청년운동에 투신하고 있었다. 기독학생운동 단체인 KSCF는 1948년 조직되었으나 1969년 11월 대한기독학생전국연합회(korean Student christian Movement)와 YMCA 대학부가 통합, KNCC 소속 6개 교단 학원선교위임단체로 새롭게 출발했다. 

한편 오재식 선생은 기독학생들이 노동현장, 농촌현장, 빈민현장으로 들어가서 사회개발운동을 한다는 원칙 아래 1968년 학사단을 조직했다. 당시 KSCF 회장은 나상기였고, 학사단 단장은 황인성이었다. 
 
▲ 1970년대 광주대단지 판자촌

학사단은 결성된 이후 주로 농촌지역을 다니면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 학사단이 경기도 광주로 간다면 도시빈민지역에서 활동하는 첫 프로그램이 되는 셈이었다. 나는 1970년 8월에 이 학사단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팀장으로 10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광주 대단지로 내려갔다. 그때 학생 대표는 외대를 다니던 나 모 씨로 기억한다. 
 
우리가 내려간 광주대단지는 서울 지역 판자촌 주민들을 이주시킨 지역이었다. 정부는 광주가 서울의 위성도시라는 명목 하에 청계천 지역을 포함한 다수의 판자촌 철거민을 집단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리고 그 일대 산과 논을 정지작업을 해서 가구당 20평씩 분양해주었다. 그리하여 이곳의 인구는 1969년 말에는 3만 5,000여명, 1970년에는 9만 6,000여명, 또 1년 뒤에는 15만 명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렇지만 이곳은 땅만 있을 뿐 변변한 시설 하나 없는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이곳에 온 사람들은 또 다시 천막이나 판잣집을 짓고 살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대책도 제대로 마련해주지 않고, 몇십만 명의 인구가 모여 살기만 하면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이상하고 안일한 발상으로 대처했다. 

그래도 서울 도심에 있을 때는 일거리가 있어 살아갈 수 있었는데, 이주해온 광주대단지는 먹고 살길이 막막했다. 사람들은 굶주림에 허덕였고, 그나마 여건이 되는 사람들은 가는 데만 두 시간이 걸리는 청계천으로 일을 하러 다녔다. 

우리는 한 달 동안 그곳에서 주민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어려움을 듣고 봉사활동을 했다. 우리가 특히 주목한 것은 교통문제였다. 아침저녁에는 손님이 있으니 그나마 버스가 자주 다녔지만, 낮에는 1시간을 넘게 기다려야 겨우 버스 한대가 왔다. 나는 이와 같은 문제의 해결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자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학생들과 함께 교통에 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교통관련 조사를 하고, 버스 증차 대책 등을 논의했다. 

이와 함께 다룬 것은 물 문제였다. 광주는 산꼭대기를 허문 흙을 논에다 부어 땅을 다진 곳이었다. 그렇지만 제대로 땅을 다지지 않아 질퍽질퍽했다. 수도에서도 흙탕물이 나왔다. 그런데 서울시가 물 상태를 점검하러 나올 때면 광주대단지 관할 출장소 직원들이 전날 밤에 각 집의 수도펌프에 물을 가득 부어놓았다. 그러면 흙탕물은 가라앉고 위에 있는 물이 먼저 나오기 때문에 그 물은 깨끗해보였다. 

게다가 모든 펌프를 조사하지 않고, 미리 물을 부어둔 펌프만 조사하도록 안내했다. 우리는 주민들에게 그 물을 마시지 못하게 안내하고, 지역 국회의원에게 실상을 알리자고 했다. 그리하여 주민대표들이 지하수를 병에 담아 차지철이 사는 서울 집으로 가서 “이 물을 마셔보라.”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나중에 수도권이 조직되고 난 뒤 내가 이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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