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훈련현장 금화 시민아파트 (20회)
  제5장 주민조직운동과 도시선교

한편 훈련생들은 자신이 담당하는 판자촌에 살면서 매일 자신이 한 활동을 육하원칙에 따라 기록하고 일주일마다 한 번씩 모여 보고하고 대화했다. 이 과정에서 화이트목사는 듣기만 할뿐 훈령생들에게 이렇게 해라 혹은 저렇게 해라 하고 조언하지 않았다. 다만 훈련생이 자신의 활동에 대해 의문 나는 점을 이야기 할 경우나 특별한 점이 있을 경우 그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대화해주었다. 

나도 훈련을 받는 동안 주민들을 상대할 때 화이트 목사처럼 반응했다. 예를 들어 수돗물이 나오지 않으면 시청에 가서 항의하라고 하는 대신 “수돗물이 안 나오니 다른 집에서 떠다 먹어야겠네요.”하는 정도로만 이야기했다. 그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모르는 부분이 있을 경우에는 우회적으로 다른 이야기를 해서 알려주었다. 

화이트목사에게 들은 이야기 중에 지금까지 기억나는 것이 있다. 화이트 목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려면 돈이 생기든지, 권력을 얻든지, 갑자기 뒷배가 생기든지 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스스로 힘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스스로 조직해야만 힘이 된다. 울분이든, 분노이든, 자기 지혜이든 이를 통해 자기 스스로 힘을 만들어야지 누가 해주어서는 힘이 될 수 없다”라고 했다. 

나는 주민조직 운동을 하면서 이 말이 진리임을 느꼈다. 주민조직가는 주민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풀무질 하는 사람이다. 그 과정에서 선동은 중요한 전술이다. 현대적 선동가로 불리는 알린스키는 “예수도 선동가이다.”라고 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요한복음 8:7)라고 했으니 예수는 그 얼마나 선동가인가. 

3기 훈련생들은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각자의 현장으로 흩어졌다. 한 조는 창신동 낙산시민아파트로 갔고, 다른 조는 연희동 연희시민아파트로 들어갔다. 나는 전용환과 함께 금화시민아파트로 갔다. 

우리의 훈련 지역인 금화아파트는 행정 배치로 보면 서대문구의 네 개의 서로 다른 동으로 구성되어 있을 정도로 서울에서 제일 큰 시민아파트였다. 네 개동은 천연동, 냉천동, 옥천동, 그리고 용천동이었다. 이 지역은 시내 중심가에서 볼 때 북서쪽에 금화산이 위치해 있어서 금화아파트 동네라고 불렀다. 

금화아파트의 17개 동은 1968년 말에 완공되었다. 114개 동은 1970년까지 완공될 예정이었다. 다른 아파트 건물들보다 더 좋은 설비를 갖춘 16개 동의 중산층 아파트는 이미 완공된 상태였다. 

금화아파트는 크게 두 세대형 아파트와 한 세대형 아파트로 나누어졌는데, 두 세대형 아파트는 50세대를 수용할 수 있었고, 한 세대형 아파트는 26세대를 수용할 수 있었다. 중산층 아파트를 제외한 131개 동에는 대략 4,000세대가 사는 듯 했다. 
 
▲ 허버트 화이트 목사 방문 시 수도권 주민조직 관계자들과 함께

금화아파트에는 판잣집에서 살다가 온 사람들이 아니라 타지역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더 많았다. 대개는 신혼부부였다. 1968년에 지어진 6개동의 경우 처음 들어와 살던 판자촌 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새로 이사 온 사람들로 채워졌다. 가난한 판자촌 사람들이 내부공사비를 감당하지 못해 아파트를 전매하고 나갔기 때문이다. 

금화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은 원주민과 외지에서 이사 온 사람들로 구분되었다. 건물이 몇 년에 걸쳐 지어지고 있어서 언제 입주했느냐에 따라 동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원주민 중에는 실업자가 많고, 외지에서 온 사람들 중에는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특이한 것은 원주민의 경우 여성이 공장에 나가 집안경제를 책임지는 집이 많았다는 점이다. 

당시 금화아파트의 주민지도자는 대개 두 범주로 나뉘어졌는데, 한쪽은 원래의 판자촌 지역을 재개발 하는 것을 지지했고, 다른 한쪽은 시민아파트를 원하던 사람들이었다.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원주민들보다 경제적인 능력이나 교육수준이 나았기 때문이다,. 

금화아파트에 대한 이러한 내용은 내가 훈련을 받을 때 작성한 메모를 화이트 목사가 정리해둔 것을 참조한 것이다.(권호경 엮음, ‘가난한 사람들의 함성-주민조직운동을 통한 선교’, 한국주민운동정보교육원, 2001)

나와 함께 훈련을 받은 전용환은 1기 때 6개월 간 훈련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당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orea Student Christian Federation) 직원이었는데, 오재식 선생이 학생사회개발단(이하 학사단)을 지도하여 훈련을 받게 했다. 
 
전용환과 나는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 집에 방 한 칸을 얻어 같이 살았다. 8평짜리 그 집은 방이 두개였는데, 한 방이 3평정도 됐다. 나는 그곳에서 1970년 1월부터 훈련이 끝난 6월까지 살았다. 바로 앞집에는 진산전 씨가 살고 있었다. 그는 주민지도자로 활약했는데, 1971년 6월 28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시민아파트 골조공사비 일시불 상환반대 시위를 할 때 시민아파트자치운영연합회 회장으로 이 일에 앞장서기도 했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신학교에 들어간 터라 내가 맡은 현장 구석구석을 참 열심히도 돌아다녔다.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박형규 목사는 훈련을 잘 받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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