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자촌이 있는 곳을 찾아 (12회)
  제4장 목회를 시작하다

한신대에 입학하면서부터 나는 새밭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가야할 곳은 판자촌교회라는 평소의 생각대로 나는 당시 살고 있던 마장동을 중심으로 빈민지역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 사는 소위 달동네를 발견했는데, 새밭교회는 그 달동네에 위치한 교회였다. 지금의 성동구 행당동지역이다. 행당동은 응봉산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새밭교회는 응봉산 줄기의 봉우리 한 켠에 자리 잡고 있었다.

새밭교회보다 더 깊숙한 골짜기에 자리 잡은 천은교회에도 관심이 갔다. 두 교회 중 하나를 택해야했는데, 새밭교회에는 선배 전도사도 있고 좋은 동지들도 있었다. 교통이 좀 편리하다는 것도 새밭교회로 마음이 기우는데 한몫했다. 

선배전도사인 김해철 전도사는 담임목사가 새로 부임하자 교회를 떠나 루터교로 갔다. 그는 나중에 루터신대 총장이 되었다. 나이가 많은 김계성 전도사는 함경도에서 피난을 와서 새밭교회가 창립된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나는 새밭교회에 가서 주일학교 교사도 하고 성가대도 하면서 지내다가 신학교룰 졸업한 1969년 2월부터는 전도사로 사역했다. 담임목사는 일본에서 온 조종협 목사였다. 전도사는 주로 교육분야를 담당하지만, 나는 교육뿐 아니라 교회 일을 전반적으로 맡아 했다. 

당시 새밭교회 중고등부 학생이던 김병국 목사, 김인태 목사, 배성호 장로, 그리고 뒤늦게 교대에 들어가 교사가 된 윤원로 선생이 떠오른다. 

김병현 장로는 주일학교에서 만나 친구가 된 뒤 지금까지 친분을 나누며 만나고 있다. 그는 엿장수를 하면서 공부를 해 건국대 축산과와 원예과를 졸업하며 교사를 하다가 한신대에서 은퇴했다. 내게 영향을 많이 준 이 친구는 지금도 내가 하는 NGO단체에 후원을 제일 많이 하는 친구이기도 하다.

새밭교회 전도사 시절을 돌이켜보면 누구보다 김계성 전도사가 가장 많이 생각난다. 그는 내게 목회자가 심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심방을 갈 때마다 김계성 전도사의 손에는 늘 보따리가 하나 들려 있었다. 그 보따리에는 온갖 생필품이 들어 있었는데, 쌀이나 반찬뿐만 아니라 빵, 과자, 사탕 같은 것도 들어 있었다. 

심방을 마치고 나올 때면 그는 그 집에 필요하다 싶은 물품을 하나씩 슬쩍 놓고 나왔다. 여신도회에서 걷은 성미(誠米)를 가지고 다니다가 끼니를 거르고 있는 집에 놓고 오기도 했다. 그것은 김 전도사가 교인들의 가정사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교인들과 그들의 가정을 관심 있게 보고 있다가 필요한 일이 생길 때면 늘 보이지 않게 도움을 주었다. 

한번은 나와 동년배로 주일학교 교사를 하던 친구의 집에 심방을 간 적이 있다. 나는 그 친구가 그렇게 어려운 사정에 처해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저 교회 일을 열심히 하는 교사라고만 생각했다. 

친구의 집에 들어서자 집안이 너무 컴컴한 것에 먼저 놀랐다. 그의 아버지는 아파서 누워계셨고, 어머니는 계시지 않았다. 친구의 어린 동생들은 학교도 가지 않고 자기들끼리 놀고 있었다. 그 친구는 무척 당황해하는 표정이었으나, 김 전도사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 한신대 시절 강원도 양구로 간 워크캠프에서 (19673 여름)

심방을 마친 뒤 그는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고, 친구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러고는 나오면서 성미꾸러미를 슬며시 문안에 던져 놓았다. 나는 김 전도사를 뒤따라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김 전도사가 놓고 간 줄을 모를 정도로 재빠른 행동이었다. 김 전도사는 나에게조차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하면 가난한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그들의 필요한 부분을 도와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NGO를 하면서 내가 직원들에게도 강조하는 본분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자존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존중이 있는 도움을 줄 때 그 도움을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시너지 효과를 낼수 있는 것이다. 주는 자의 위치라고 해서 받는 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자못 엉뚱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심방을 따라나설 때마다 나는 모자공장 다닐 때 종종 배를 곯던 일이 떠올랐다. 공동으로 먹을 반찬은 먼저 먹고, 개별로 주어지는 밥과 국은 나중에 먹었던, 그렇게라도 배를 채우려고 한 공장 동료들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한때는 그러한 행동이 그들의 이기심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사실 배고픈 나날을 보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방법이었던 것이다. 

가난한 동네의 심방을 다니며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왜 사는 지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한편 심방을 다니면서 가난한 동네의 특이점도 알 수 있었다. 가난한 동네일수록 남자들이 일을 하지 않고, 여자들이 가정을 책임지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장로 한분이 있다. 부인이 때밀이를 하면서 어렵게 돈을 벌어 집안경제를 감당하고 아이들을 공부시키는데도 그는 일자리를 찾지 않았다. 

그런데 희한하게 다른 나라의 빈민촌에서도 이와같은 현상을 흔히 볼 수 있다. 여자들은 폐지라도 주우면서 어떻게든 생활비를 벌기 위해 노력하는데, 남자는 일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가부장적인 사회일수록 특히 그런 일이 빈번한 것 같다. 그러한 현상이 사회적인 것인지, 인류학적인 것인지 혹은 생래적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가난한 지역일수록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는 것은 세계 공통인 듯하다. 

1971년 5월, 나는 새밭교회를 그만두었다. 이제 나도 진로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새밭교회 전도사로 있는 동안 나는 연세대 도시문제연구소에서 진행하는 도시선교 주민조직 훈련과정을 수료했다 그리고 그 훈련을 통해 주민조직운동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훈련과 경험이 쌓이는 동안에 나는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선교(mission)는 주민조직 운동에 바탕을 두고 수행해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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