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조사로 끊임없이 괴롭히다 (11회)
  제3장 우리 모두 감시받고 살았다

1970~80년대에 운동권 사람들은 거의 모두 뒷조사를 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 이야기를 하다 보니 뒷조사를 당한 또 하나의 경험이 떠오른다. 

우리 딸이 고3일 때였으니 1985년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딸 아이는 학교수업과 보충수업이 끝난 밤 10시 이후에도 동네에 있는 독서실에 가서 공부를 하고 새벽 1시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새벽 6시에 다시 학교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나는 늦은 시간에 들어오는 딸이 걱정되었지만, 수험생인 딸은 예민해져 있는데다 자신이 어렸을 때 집밖을 떠돌며 가정을 소홀히 한 나에게 화가 난 상태여서 나를 보면 신경질적이 되었다. 그래서 마음대로 마중을 나갈 수도 없었다. 결국 우리 부부는 독서실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가기로 결정하고 부동산에 집을 내놓았는데, 시국이 시국인지라 집 매매가 잘 되지 않았다. 

어느 날 출근 길에 나는 가끔 이용하는 동네 개인택시 기사의 차를 타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 따라 택시 기사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운전 중에 긴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안면이 있는 터라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택시기사에게 또다시 다그치듯 물어보았다. 혹시 그 사람이 나를 태워주어 무슨 불이익이나 귀찮은 일을 당했는가 싶어서였다. 

나는 내가 출근할 때마다 우리 집 뒤편 언덕에 있는 아파트수위실에서 누군가가 사진기로 나를 촬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 나를 태워준 택시기사들이 누군가로부터 온갖 질문에 시달림을 당했다는 사실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나는 감시를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택시기사도 그런 일 때문이 아닌가 싶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아니었다. 내가 자꾸 묻자 택시기사는 하소연 하듯 자신이 처한 상황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택시기사를 오래 하면서 모아둔 돈으로 집을 하나 사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마침 군 장성인 동생이 내가 집을 사면 보태준다고 해서 덜컥 은행빚을 안고 집을 계약했어요. 그런데 동생에게 갑자기 일이 생겨 도움을 주지 못하게 된 거예요. 동생이 줄 돈까지 생각해서 은행대출을 했는데, 난 그 정도까지 갚을 여유가 없거든요. 다시 팔려고 해도 세상이 하도 이 지경이라 매매가 도통 되질 않네요. 그래서 밥을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아요.”

“기사님이 산 집이 어딘데요?”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택시기사가 산 집은 독서실과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기쁜 마음에 나는 즉시 제안을 했다. 

“저도 집을 팔려고 내놓았는데, 매매가 되지 않아 애를 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 가려고 하는 곳이 마침 기사님 집 근방이예요. 그래서 말인데, 요즘 매매하기가 어려우니 우리 서로 집을 맞교환하면 어떨까요? 기사님 집이 우리집 보다 넓고 큰 길에서 가까우니 은행 대출은 제가 안고 맞바꾸면 되지 않겠습니까?”

내 제안이 황당했는지 택시기사는 처음에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인데다 내가 자꾸 이야기를 하자 차차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딸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양해를 구했더니, 그는 이해한다면서 집을 바꾸는데 동의했다. 우리는 부동산에 가서 계약서를 작성하고 기분 좋게 헤어졌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계약서를 써준 부동산 아저씨가 우리집에 찾아왔다. 그는 “어떻게 서로 집을 바꾸게 되었는가?” “차액은 어떻게 처리했는가?” “그 기사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등등 별별 질문을 다했다.  

▲ 80년대초 방배동 / 아파트와 한옥이 공존하고 있다 [출처 ; 보배드림]
 
나는 어안이 벙벙하다 못해 화가 났다. 그래서 모든 대답을 거절하고, “부동산 소개비를 받으셨으면 되지 않아요?”라고 쏘아붙이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하지만 부동산 아저씨는 가지 않고 대문밖에 계속 서 있었다. 몇 번 문을 두드리다가 나중에는 통사정을 했다. 

그는 나이가 많은 영감이었는데,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저는 부동산을 해서 밥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부동산에 형사가 거의 살다시피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애원을 했다. 

그 형사에게 부동산 아저씨가 얼마나 시달릴까를 생각하니 계속 무시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집을 맞바꾸게 된 사연을 자세하게 들려주고, 은행융자와 지불한 내역까지 이야기해주면서 그 형사에게 은행에 가서 확인해보면 될 것이라고 전하라고 했다. 

그는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계속했다. 그러고는 그 형사 욕을 마구 퍼부어댔다. 나는 “그 사람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그 사람도 오죽하면 아저씨께 그러겠습니까. 다 세상이 잘못된 것이지요.”라고 하면서 그를 달래어 돌려보냈다. 그 다음부터 그 부동산 아저씨는 나만 보면 아는 척을 하며 인사를 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기관원들이 나만 뒷조사를 하는 게 아니었다. 집을 매매할 때마다 아내에게 찾아가 돈의 출처 등 그들이 조사한 내용과 서로 말이 맞을 때까지 묻고 또 물은 모양이다. 

아내는 내가 1986년 CCA-URM실무자로 가게 되었을 때 교사생활을 접고 함께 홍콩으로 가주었다. 

1989년 홍콩에서 돌아오고 나서 한번은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어떤 할머니가 아내에게 아는 척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저 혹시 모르겠어요? 선생님이 OO학교에 근무할 때 교감이었습니다. 선생님이 목사님 사모님이라고 하던데, 전 집사입니다. 그런데 죄송하게도 그 학교에 근무할 때 제가 선생님 뒷조사를 해서 매일매일 상부에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물론 내용은 별것 아니었지만 그동안 죄의식 때문에 꼭 한번은 선생님을 만나 용서를 빌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하철에서 만나게 되네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하더란다. 

그 선생님의 갑작스런 고백에 아내는 “선생님이야 선생님 하실 일을 한 것이지요......”라고 하면서 말끝을 흐렸다고 한다. 

이 말을 전하는 아내의 어두운 표정은 평생 살면서 그전에도, 그 후에도 다시는 본 일이 없다. ‘내가 얼마나 미웠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이처럼 항상 우리는 감시 망속에서 살았다. 때로는 감시를 받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말이다. 돌아보면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조카들에게도 미안한 마음뿐이다. 심지어 큰조카인 권주만은 언론사 기자인데도 며칠 동안 끌려가서 어려움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먼 훗날에서야 들었다. 

비단 가족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남대문에 위치한 친구의 양복점에서 주로 옷을 해입었는데, 그 친구도 기관원이 경찰서에 끌고 가서 하룻밤을 괴롭혔다고 한다. 들은 것만 해도 이 정도인데, 내가 모르는 일도 많았을 것이다. 나 때문에 고초를 당한 많은 분들께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하고 싶다. 

 
  집과 기관원 (10회)
  판자촌이 있는 곳을 찾아 (1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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