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처였던 형님_2 (4회)
  제1장 가족이라는 울타리

한신대 교역과를 다니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에 형님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만 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내가 참 이기적이고 철없는 소리를 했구나.’하는 생각이 든 것은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였다. 나는 나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던 형님의 눈빛이 내내 마음 쓰였는데, 그 눈빛이 무엇을 말 하는가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다.

당시 형님은 농사를 지으면서 전도사 생활도 하며 어렵게 가정을 꾸려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병석에 누워계시는데다 학교를 다녀야 하는 다섯 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게다가 형님이 개척한 교회와 교인들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니 형님이 세월 좋게 공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오식 형님은 내가 살길을 마련해주었다. 내가 군대를 제대하고 고등학교에 편입했을 때,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쌀을 보내주기도 했다. 게다가 내가 신학교를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65년에 형님은 논을 정리하며 쌀 110가마를 보내주었다. 당시 쌀 110가마는 시골에서는 큰 재산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팔아 수유리에 있는 작은 가게가 딸린 집을 한 채 구입해서 그 집을 전세로 놓고 그 돈으로 학교에 다녔다.

그러던 중 형님이 빚을 많이 지고 있다는 알게 됐다. 그래서 가게 집을 팔고 조그만 주택을 한 채 구입했다. 그리고 쌀 70가마 정도 되는 돈을 빚을 갚으라고 주었는데, 그 가치는 1년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집값은 많이 뛴 반면 쌀값은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뒤로도 나는 집을 팔았다 샀다 하면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조달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형님이 밑천을 주었기 마련해주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에게 특별한 존재였던 오식형님의 부음을 듣게 된 것은 내가 스리랑카 출장을 갔을 때였다. 당시 나는 아시아기독교교회협의회 도시농어촌선교위원회(Christian Conference of Asia Urban Rural Mission. 이하 CCA-URM) 간사로 홍콩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 형님 권오식

형님의 죽음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한 순간 온 세상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곧바로 홍콩으로 돌아와 서둘러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를 탄 순간에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았다. 마침 손에 잡힌 수첩에 정신없이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형님, 이제 와서 그동안 형님이 겪은 아픔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너무 갑자기 가십니다.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우리는 왜 그동안 표현을 못하고 살았을까요? 그 많은 굴곡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속으로만 삭히고 살아왔네요. 왜 그랬을까, 후회스럽지만 그것도 이미 늦었습니다. 쥐어뜯기는 이 심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도 없지만, 있다고 하더라도 형님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시네요.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못하고 살았지요. ......이제 형님은 승리자이십니다. 어머니처럼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지요. 무엇에서, 어떻게 해서 승리인지 말입니다. 아쉬운 것은 1970년대 들어서면서는 형님과 앉아서 같이 이야기 할 시간도 없었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쫓기며 살았는지, 그래도 형님이 계실 거라고 믿으며 살아왔는데, 이제 한순간 대화도 못 나눈 채 그냥 먼저 가버리셨네요.

저는 70년대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제가 먼저 갈 줄 알았습니다. 형님은 저를 무척이나 사랑하셨는데, 당신 살보다 당신 뼈보다 이 못난 놈을 사랑하셨는데...... 이제 후회해도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이제 형님이 저를 사랑한 것처럼 저도 힘 닿는대로 형님께서 남겨두신 가족의 울타리라도 되겠습니다.

형님, 안심하십시오. 시간이 날 때마다 조카들과 형님이 못 다하신 말씀을 전하면서 살아보겠습니다. 형님은 그 모진 고난 속에서도 주만, 주석, 주암, 선옥, 선숙이를 잘 키우셨어요. 저도 힘닿은 대로 이 민족을 위해 살아가려고 합니다. 예수의 제자로, 형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 한 몸 바치려고 합니다. 이것이 형님의 본분을 따르는 저의 길이란 생각이 듭니다.

형님, 비행기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니 우리 땅, 우리 민족의 모금자리가 이렇게 고운데 이제 형님은 이것을 볼 수 없게 되었네요. 형님을 제대로 뵙지 못하고 이야기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면서 살아온 지난 30년, 제가 못된 일도 많이 했지만, 하나님께 이끌려 가끔 좋은 일도 했을 겁니다. 만일 아름다움이 저에게 있다면 이제라도 그것을 형님에게 모두 드리오니 받아주십시오.

하나님, 이 분을 고이 품어주소서.

1987년 5월 7일


공항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형님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서울대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나는 형님을 감싸 안고, 이미 식어버린 형님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때 처음으로 죽은 사람의 몸이 그토록 차갑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디찬 형님의 몸은 검고 푸른 반점으로 뒤덮여 있었다. 예상한대로 약물중독이었다. 조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심방을 마친 형님이 몸이 좋지 않아 한약재료인 ‘부자(附子)’를 넣은 한약을 끓여서 뜨거운 채로 마셨다는 것이다. 부자가 든 한약은 반드시 식혀 마셔야 하는데 한의사가 주의사항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당시 형님은 보령시 성주교회의 담임 전도사로 있었기 때문에 교회에서 많은 교인들이 장례식장을 찾아왔다. 그런데 장로 한 분이 울분에 찬 목소리로 한의사를 고발해야 한다고 성토했다. 교인들도 이에 동조하고 나섰다. 하지만 나와 조카들은 그 장로를 말리고, 교인들을 이해시켜야 했다. 형님도 한의사를 고발하는 것은 절대 반대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형님은 부모님이 묻히신 선산에 모셨다. 그렇게 형님은 형수와 다섯 명의 조카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때 형님의 나이 53세였다.

 
  의지처였던 형님_1 (3회)
  결혼과 장모님의 도움 (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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