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엄한 경비 속에 미완성으로 끝...

전단에는 간단한 구호만 넣기로 하고, 그 내용은 “회개하라, 때가 왔느니라” “회개하라, 위정자여” “주여, 어리석은 왕을 불쌍히 여기소서” “화 있을 진저 위정자여” “국민주권 대부받아 전당포가 웬말이냐” “주님의 날이여, 어서 옵소서, 73년 부활주일 새벽에” 등 성경적인 표현을 중심으로 했다.

또 “회개하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윤필용 장군을 위해 기도합시다” 등의 표현도 포함시켰다. 그 뒤로 나상기 씨는 이 일을 같이 할 학사단 학생 몇 명을 불렀는데, 나는 그들을 일일이 만나지 않았기에 누가 함께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플래카드 열개와 전단지 2,000장을 만드는 데는 15만 원 정도가 필요했다. 나는 이 비용을 맡기로 했는데, 15만원 중 10만원은 남삼우 씨에게 주고, 5만원은 김동완 목사에게 주기로 했다. 그런데 15만원이면 당시 내 월급의 7개월 치라서 혼자서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박형규 목사를 찾아갔다. 대략 계획을 말씀드리자 박 못사는 아주 흡족해했다. 그리고 선뜻 15만원을 내주었다.

마침내 4월 22일 새벽 5시, 부활절연합예배가 성대하게 열렸다. 10만 명도 넘게 모였다고 했다. 부활절연합예배는 순서대로 잘 진행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계획에는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플래카드를 펼치기로 한 진산전 씨 팀 중 몇 명이 플래카드를 미처 펴보지도 못하고 경찰에 빼앗겨 버린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 모습을 보고 머뭇대다가 결국 기회를 놓쳤고, 사용도 해보지 못한 플래카드는 각자 집으로 가져갔다.

전단을 맡은 나상기 씨 팀은 플래카드가 펼쳐지는 것을 보고 전단을 뿌리기로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플래카드가 보이지 않자 하는 수 없이 행사가 끝난 뒤 나오면서 길에 버리듯이 뿌리거나 몇몇 사람에게 배포했다고 한다. 삼엄한 경비 속에 모든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계획이 행사 전에 발각된 것인지, 아니면 행사장의 삼엄한 경비 때문에 제대로 실행되지 않은 것인지는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유호준 목사가 정보원에게 말을 하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그랬다면 우리가 준비조차 할 수 없었을 뿐더러 부활절연합예배가 열린 그날 곧바로 체포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절연합예배 때 뿌려진 전단은 곧장 당국의 손에 들어갔다. 전단의 내용을 보고 당국은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단에 적힌 표현은 기독교적이었으나, 그 내용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한눈에 봐도 알 수 없었다.

당국은 남대문경찰서에 수사본부를 차렸다. 그리고 현상금 100만원을 걸어 전단과 관련 있는 사람들을 수배하기 시작했다. 수사본부는 우선 각 대학의 시위주동자들을 잡아들였다. 그 와중에 수도권 간사 손학규 씨도 잡혀갔다.

얼마 뒤에 나는 손학규 씨의 참고인신분으로 수사본부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 그곳에는 내가 손학규 씨에게 번역을 하라고 준 <타임스>가 놓여 있었다.

기관원은 나에게 이 잡지에 대해 물었다. 나는 잡지에 중국 판자촌에서 활동하는 의사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어 번역하라고 준 것이며, 이 잡지는 박형규 목사가 수도권 직원들이 읽어보면 좋겠다면서 나에게 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기관원은 나보고 그냥 나가라고 했다. 돌아서는 나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 1973년 부활절연합예배에 대한 기사(동아일보 1973. 4.23.)

보지는 못했지만 손학규 씨는 이미 고문을 많이 당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냥 풀어줄 수 없어 다른 죄를 찾고 있는 것 인상을 받았다. 실제로 손학규 씨는 자택에서 발견된 몇 권의 책과 자료가 문제가 되어 반공법 위반으로 1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그들이 찾는 사람은 나인데, 애꿎은 사람이 고생을 한다고 생각하지 정말 마음이 무거웠다. 얼마 뒤 다시 나는 남대문경찰서로 찾아가 정식으로 면회신청을 하고 손학규 씨를 만났다. 그냥 있으려니 마음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면회를 마치고 나온 나는 서울제일교회 사무실 2층으로 올라가다가 길에 세워져 있는 검은색 지프차를 보았다.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했다. 역시 그 차는 나를 잡아가려고 온 보안사 지프차였다. 그날이 6월 25일이었다. 나는 그 차에 실려서 소위 ‘범진사’라는 곳으로 끌렸다. 범진사는 보안사의 서울 분실로 당시 중앙일보 건너편에 위치한 평안교회 뒤쪽에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사방에서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조건 때리기 시작했다. 맞는 동안 ‘여기서 죽으면 안 된다. 박정희한테 지면 안 된다. 여기서 살아서 나가야 또 싸울 궁리를 할 수 있다.’는 생각만 들었다.

보안사요원은 나를 흠씬 때린 뒤에 자꾸 “불어. 불으라고!”라고 하면서 윽박질렀다. 하지만 나는 뭘 불어야할지 몰랐다. 이것저것 저질러 놓은 일이 많아 ‘걸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둘째 날에도 역시 여러 명이 달려들어 때리기부터 시작했다. 몽둥이로, 발로, 손으로 닥치는 대로 때리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구타를 멈추더니 “데리고 가자.”라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아, 살았구나’싶었다. 주차장으로 내려와서 보니 남삼우 씨가 몸을 겨우 가눈 채로 엉거주춤 서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이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아, 이일 때문이구나.’라고 생각하니 쾌감마저 들었다.

과장을 좀 보태서 남삼우 씨를 만난 것이 하느님을 만난 것 인양 기뻤다. 나처럼 벌여놓은 일이 많은 사람은 고문을 받을 때에도 무엇 때문에 고문을 받는지를 몰라서 무조건 꾹 참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 이거저것 말해버리면 그야말로 엉뚱한 사람이아 조직에 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다.

남삼우 씨를 보고 내가 잡혀온 것이 부활절연합예배 때문인 것을 깨달았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전에 진산전 씨가 나를 찾아와서 돈을 좀 달라고 한 일이 있었다. 이유를 묻자 자기네들이 무엇을 하려다가 들켰는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빌미로 자꾸 협박을 한다는 것이었다.

상황을 살펴보니 남삼우 씨가 이철홍 씨에게 플래카드 제작을 맡겼고, 이철홍 씨는 진산전 씨에게, 진산전 씨는 주민지도자들에게 플래카드 제작을 맡겼다고 한다. 그들은 거의 야당인 신민당원들이었다.

문제는 사소한 것에서 발생했다. 진산전 씨의 연락으로 부활절연합예배에 온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그날 펴보지도 못한 플래카드를 기념 삼아 집에 가져간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사를 하다가 이삿짐 나르는 것을 도와주러 온 처남에게 플래카드를 들키고 만 것이다. 하필 그 처남은 보안사에서 근무하다가 어떤 일로 보안사를 나온 사람이었다.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은 그는 플래카드를 빌미로 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진산전 씨는 고민을 하다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내가 그 일의 주동자인 것은 모르고 말이다. 그래서 두 번인가 2만원을 건네주었다. 2만원은 내 한 달 월급이었다. 그런데 진산전 씨가 또 다를 찾아왔다. 이제 돈도 없는데다가 사건도 조용히 처리되는 것 같아서 더는 돈을 주지 않았다.

돈을 뜯어가던 사람은 이종란이었는데, 공무원사칭 등의 혐의로 보안사령부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플래카드에 관한 발설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남산 부활절연합예배사건은 뜻하지 않게 보안사령부의 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