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제일교회에서 만난 인연 (14회)
  제4장 목회를 시작하다

서울제일교회에서 나는 처음에 김숙희 전도사와 함께 사역을 했는데, 김 전도사는 곧 다른 교회로 옮겨갔다. 박형규 목사는 1972년 11월 26일 담임목사로 정식 부임했고, 나는 이듬해 11월에 부목사가 되었다. 

부목사가 된 시기는 내가 남산 부활절 연합 예배시건으로 내가 징역을 살고 나온 뒤였다. 박 목사와 내가 이 사건으로 징역을 사는 동안 서울제일교회는 박성자 목사가 와서 수고해주었다. 다시 교회로 돌아왔을 때, 박성자 목사는 교회를 개척해나갔다. 

박형규 목사가 나에게 여성 목회자를 알아보라고 해서 여러 사람을 소개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여전도회 총무인 나성철 전도사에게 부탁하여 박준욱 전도사를 소개받았다. 

박 전도사의 남편은 최풍식 장로로 충청남도 서천에 있는 사립중학교의 교사였다. 이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지방에서 서울로 학교를 옮기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될까 고민하다가 한신대에서 기획실장을 맡고 있던 김성재 교수에게 이 문제를 털어놓았다. 다행히 한신대 교직원으로 받아 줄수 있다고 해서 온 가족이 함께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내가 박준옥 전도사를 잊을 수 없는 것은 박 전도사가 서울제일교회에 와서 엄청나게 교생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교회를 사임한 뒤 교회는 여러 시련을 겪었다. 보안사의 조작으로 교인들이 분열되어 예배를 방해하는 일도 있었고, 조직폭력배들이 박형규 목사와 교인들을 당회장실에 감금하고 협박한 일도 있었다. 그들은 교회로 들어와 난동을 부리거나, 교회 앞 노상에서 예배를 드릴 때 찾아와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그런데도 박 전도사는 끝까지 교회와 함께 해주었다. 그 과정에서 받은 수많은 상처와 고난은 이루다 말할 수 없다. 박형규 목사와 내가 고초를 당할 때에도 교인들이 분열되어 서로 증오하고 싸울 때에도 박 전도사는 전도사라는 어려운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그 역할을 감당했다. 나중에 교회에서 쫓겨난 박형규 목사와 교인들이 중부경찰서 앞에서 드린 예배를 시작으로 길고 긴 노상예배의 길을 걷게 되었을 때에도 박 전도사는 박형규 목사 곁에서 그 뒷바라지를 선실하게 감당했다. 

그 와중에 개인적으로 박 전도사에게 가슴 아프고 슬픈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참척의 아픔이었다. 그녀는 슬하에 남매를 두었는데, 아들 의건이는 서울대를 졸업했을 정도로 똑똑한데다 얼굴도 잘 생긴 청년이었다. 의건이는 해병대를 지원해 입대했는데, 망망대해에 뜬 배 안에서 선임자에게 기합을 받다가 쇠파이프로 잘못 맞아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새벽에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듣고 나는 서둘러 의건이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군병원을 찾아갔다. 새벽 4시쯤 병원에 도착하니 박 전도사를 비롯한 그녀의 가족들이 비통한 울음으로 의건이와 작별을 하고 있었다. 박 전도사가 나를 보고 “목사님, 우리 아들을 위해 기도해주세요.”하며 울먹였다. 그런데 나는 도저히 기도해줄 수가 없었다.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입이 완전히 굳어버린 것처럼 마음도 얼어붙어 버린 것만 같았다. 입을 열면 욕만 나올 것 같아서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버티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박 전도사는 나에게 얼마나 서운하고 화가 났을까. 그녀는 “목사님은 우리 아들 잘 아시잖아요? 우리 의건이 얼마나 착해요.”하면서 펑펑 울며 몸부림을 쳤다. 그렇지만 나는 끝내 기도해주지 못했다. 
 
박 전도사 가족이 교회 옥탑방에 살았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었다. 자주 같이 밥도 먹고, 커가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장례식 이후에도 박 전도사를 몇 번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의 내 심정을 끝내 이야기하지 못했다. 아직까지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가족은 딸 성실이와 함께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으니, 어쩌면 살아있는 동안 말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에서나마 내가 왜 그랬는지를 털어놓는다.
 
▲ 서울제일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1973년 11월 부목사로 취임했다

서울제일교회는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당시 군부독재 정권은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서서히 옥죄며 억압하고 있었다. 이처럼 암울한 시대적 현실에서 미래를 꿈꾸어야 하는 젊은이들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곳이나 사람이 필요했다. 

예수를 믿거나 믿지 않거나 관계없이 자신들의 고민을 토로하고 싶은 청년들은 서울제일교회로 몰려왔다. 박형규 목사는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자신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고, 상담도 잘해주었기에 순전히 박형규 목사를 보러 오는 사람도 많았다. 

특히 박 목사는 대학생이나 노동자, 빈민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만사를 제쳐놓고 그들을 먼저 만났다. 당시 서울제일교회에 찾아오는 대학생들 중에는 노동현장이나 농촌으로 들어가는 이들도 있었고, 야학을 하거나 빈민지역에 들어가 사는 이들도 있었다. 손학규, 나병식, 구창완, 정인숙, 임진택 등도 자주 교회에 찾아오던 사람들이었다. 

강정래는 탈춤반을 조직해서 함께 탈춤을 추는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또 다른 이들은 연극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김지하가 대본 쓴 <금관의 예수>도 서울제일교회에서 첫 무대를 올렸다. 김민기는 <금관의 예수> 도입부에 나오는 시에 곡을 봍여 노래로 만들었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어디에서 왔나 
얼굴 야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메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연극 <금관의 예수> 중에서 ‘주여 이제는 여기에’ 부분

말할 곳을 찾아서, 표출한 곳을 찾아서 서울제일교회로 많은 대학생들과 노동자, 청년이 모여들 때 나의 임무는 이들의 활동을 교회에 바르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또 굉장히 예민한 부분이어서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교회의, 전도사나 부목사의 역할과는 확연히 달랐다. 
 
제일 어려운 점은 외부에서 정보를 캐내기 위해 드나드는 기관원들, 즉 서울지방경찰청(시경), 치안본부, 보안사, 중앙정보부 요원들과 이들을 잘 모르는 순진한 교회 관계자들과의 대화내용에 대처하는 일이었다. 대화하는 내용이 엉뚱하게 발전해 장로들 혹은 교인들에게 잘못 알려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
 
정보기관원들은 처음에는 전도사를 만나더니, 전도사가 교회를 떠나자 장로들을 집중해서 만나고, 그래도 안 되자 이번에는 교인들을 한 사람씩 찾아다니며 만났다. 그러고는 이것저것 떠보거나 집요하게 물러보기도 했다. 사실 기관원들 입장에서도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위에서 지시하니 오긴 왔는데, 교회에 별 내용이 없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혹시 잘못 전달되는 내용이 있을까봐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목사로서 모든 기관원을 항상 나쁘다고 할 수도 없었다. 또 저 사람과 만나지마라, 같이 차 마시지 마라, 그런 식으로 일일이 간섭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로 문제를 제기하는 교인들이 많아지자 나중에는 할 수 없이 기관원들의 교회출입을 막아야 했다. 그랬더니 몰래 불러내서 만나거나,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교인의 집으로 찾아가거나, 직장으로 찾아가는 등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기관원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사람은 바로 김 형사이다. 그는 정보를 캐내는 데 출중한 능력이 있었다.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정보가 될 만한 것을 캐내고, 그 정보를 필요에 따라 다른 정보기관에 공유하는 능력도 남달랐다. 그는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교인이다 싶으면 잘 구슬러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면서 친하게 지냈다. 

교인들 중에서 현명하게 대처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교회 직원인 이옥선 집사나 수도권에서 일하는 황인숙 집사 같은 사람들은 기관원들을 노련하게 잘 따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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