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픈 아시아 사람들과 CCA-URM (54회)
  제10장 배고픈 아시아 사람들과 함께한 CCA URM

나는 유렵사람들의 개발프로그램이 아프리카나 남미를 모두 망쳐놓았다고 생각한다. 유엔은 개발프로그램을 시도했으나 자연환경을 훼손하면서 자신들의 입장에서 개발을 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는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벌목을 하고 숲을 황폐화시켰다. 

아프리카에 원래 물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무분별하게 개발을 하다 보니 물이 부족해진 것이다. 그런데 URM 프로그램은 개발프로그램에서 좀 더 진일보한 것이다. URM에서는 일반적인 개발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기네 땅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해야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찾을 수 있다. 

외국인들이 찾아와 그들 취향에 맞게 개발을 해주고, 그들 상품을 판매하는 그런 사이클로는 안 된다. 그 지역, 그 나라의 상황과 사정은 그 지역의 주맨, 그 나라의 국민이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 그런 이유로 URM 프로그램과 개발프로그램은 다르게 작동한다. 게다가 개발프로그램으로 인한 환경무제가 대두되자 URM 프로그램은 세계적으로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나는 1970~80년대 한국 URM 운동이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을 넘어 민중신학으로 세계교회에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억눌린 자와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할 때 예수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되어간다고 빋기 때문이다. 

CCA-URM은 북쪽의 네팔에서부터 남쪽의 뉴질랜드에 이르기까지 16개국의 바닥 운동권에 자리하고, 이들 각 나라의 각기 다른 문제들을 가지고 현장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행동했다. 나는 서로 다른 현장의 소리를 듣고 돕는 자의 위치에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CCA-URM에서 활동하는 동안 나는 농민운동, 노동운동, 여성노동자운동, 마이노리티(원주민, 산족, 소수민족) 운동, 각국 실무자 훈련, 이주여성 노동자문제(중동, 홍콩, 대만, 일본 등), 긴급상황 대책문제(스리랑카 타밀 문제), 대만 원주민 문제, 호주 원주민 문제, 뉴질랜드 땅 문제, 대만 어민문제(대만 원주민), 경제정의 문제 등을 가지고 협의회도 하고 각기 다른 대책을 세우고 지원도 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대만의 원주민에 대한 이야기이다. 대만의 원주민은 대개 6개 부족으로 나뉘는데, 1980년 중반까지 이 부족들의 여자아이들이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도시로 팔려갔다고 한다. 계약기간은 약 3년이고, 그 대가는 미화로 5~7만달러 쯤 되었다. 

돈을 받은 부모들은 보다 좋은 집에서 조금 더 나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 정보가 차단된 지역에서 살다 보니 부모들은 자신들의 딸이 팔려가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좋은 데로 취직되어 가는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딸들은 3년의 계약기간이 끝나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수치심 때문에 고향에 가는 것을 망설였기 때문이다. 결국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여성들은 일본의 야쿠자에 의해 일본 농촌 등에 또 다시 팔려갔다. 

이 6개 부족의 신학교가 수도 타이베이에 있는데, 이 학교의 학생들은 졸업 후에 타이베이 등 도시에서 목회를 하지 못하고 다시 원주민 지역으로 돌아가야 했다. 교단과 정부가 정책적으로 그렇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더 깊이 파고들 수가 없었다. 
 
 
▲ URM 선배들 / 왼쪽부터 권호경, 타드 부인, 나이난 부인, 조니 나이난, 이은자, 조지 타드

한편 원주민들은 대개 어업에 종사했는데, 그들은 멀리 인도네시아 근해까지 가서 어업활동을 했다. 사실 그들은 선주에게 팔려가다시피 해서 배를 탔다. 그런데 만일 인도네시아 근해에서 어업활동을 하다 순시선에 잡히면 한 사람당 미화 5,000달러를 내어 석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상당수는 벌금을 낼 돈이 없어 거의 죽을 때까지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언젠가 인도네시아 근해에서 고기를 잡다가 순시선에 잡혀 재판을 받게 된 한 어부의 웃지못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재판정에서 판사가 “왜 인도네시아 구역에 와서 고기를 잡았는가?” 하고 묻자 그 어부는 “아닙니다. 제가 잡은 고기는 대만 고기입니다. 저는 그 고기를 대만에서 계속 좇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잡고 보니 인도네시아 구역이었습니다. 저는 절대로 인도네시아 고기를 잡은 일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더란다. 

자신은 절대로 인도네시아 고기를 잡은 일이 없다고 항변하는 이 어부의 말(원주민어)를 대만어로 통역하고, 이를 다시 인도네시아어로 통역하다보니 한동안 재판이 제대로 진행될 수 없었다고 한다. 

스리랑카에 살고 있는 타밀족 이야기는 기억에 남는다. 스리랑카에는 오래전부터 상할라족과 타밀족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1815년 영국이 스리랑카를 지배한 이루 인도에 사는 타밀족을 본격적으로 스리랑카에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차를 재배하는데 그들의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이 두 민족을 이간질하는 정책을 쓰면서 갈등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1948년 스리랑카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으나 상할라족과 타밀족간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내전으로까지 번져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살상을 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현재 스리랑카는 차로 유명하지만 초창기에는 영국인들이 차를 재배했다. 차는 산이 높고, 바닷바람이 좋은 곳에서 잘 자란다고 하는데, 사실 영국도 그런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영국이 자기네 나라에서는 차를 재배하지 않고 스리랑카나 인도네시아 등에서 재배한 것은 현지인들이 노동력을 싼값에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여기에 자국의 환경을 보존하려는 의도도 숨어 있었을 것이다. 물론 미래에 두 민족 간에 그렇게 심한 갈등이 생기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그런 일을 벌인 것은 아닐 테지만 그와 비슷한 사례는 세계 곳곳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홍콩정부의 보초병은 ‘골카 솔저’이다. 그들은 지금도 파키스탄 아프카니스탄에 흩어져 살고 있다. 키가 큰 골카족은 보초를 잘 선다고 해서 100년이 지난 지금도 골카 솔저가 홍콩정부를 지키고 있다. 

보르네오 왕궁은 모든 국민이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도록 정부에서 충분히 보장해준다. 그런데 영국이 점령했을 때부터 아직까지 골카 솔저들이 이 보르네오 왕궁을 지키고 있다. 젠틀맨이라는 사람들이 젠틀하게 재배했다고 하면서 사람들 정신을 빼앗고, 이상한 역사구조를 만들어낸 탓이라는 생각이 든다. 

CCA-URM은 이렇게 나라마다 혹은 지역마다 처한 문제들을 직접 접하면서 지역민들이 자신들의 현장에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도록 돕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또한 각 현장에 가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 훈련시키는 일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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