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과 훈련, 그리고 수련회를 통한 사회운동권의 연대 (47회)
  제9장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어느 날 김관석 목사가 나를 찾아왔다. 송건호 선생이 <말>지의 재정 지원을 부탁한 모양이었다. 김 목사는 내게 무슨 방법이 없겠는가 하고 물었다. 나는 김 목사에게 제안했다. 

“목사님, 독일 NGO인 EZE에 부탁하십시오. 자기들이 돈이 있으면 나눠줄 겁니다. 만약 없으면 우리 예산에서 빼주도록 요청이 올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승낙하겠습니다.”

김관석 목사는 독일 개신교개발원조국(EZE)에 부탁했고, EZE는 CCA-URM, WCC-URM실무자와 협의하였다. 그 결과 CCA-URM은 선교적 차원에서 중요하니 한국 URM에 갈 지원금 일부를 <말>지에 지원하는 것을 승인했다,
 
언젠가 송건호 선생이 나를 집으로 초대해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것이 <말>지를 지원해준데 대한 고마움 때문이라고 느꼈다. 

송건호 선생은 당시 종로5가를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그는 기독교인은 아니었으나 KNCC인권위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자존심에 세고 꼿꼿했던 그는 사실 종로5가에 올 사람이 아니었다. 그때 자주 온 사람들이 이부영, 성유보 선생 등이다. 

학생들이나 청년들이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는 암묵적인 요구에 따라 1982년 신구교연합 한국공해문제연구소가 창립되었다. 그때는 사람들이 여럿 모이는 것도 신경을 써야했다. 한국공해문제연구소 이사장은 가톨릭에서는 함세웅, 개신교에서는 전태국 목사가 맡았다. 

그리고 공해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최열과 정문화 씨가 실무를 맡았다. 나는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CCA-URM주민조직운동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공해문제 지역에 주민조직 프로그램으로 활동을 구체화시켰다. 마침 온산(울산시 울주군)에 원자력발전소가 세워지면서 공해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때였다. 

한국공해문제연구소에서는 온산공단의 흙을 몰래 파다가 일본으로 보냈다. 토양의 상태가 어떤지 조사해보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기대한 대로 한국공해문제연구소 사무실에는 김근태 등 많은 청년, 학생들이 관심을 가지고 찾아왔고 자주 드나들었다. 나는 한국공해문제연구소 사무실 근방에도 가보지 못했다. 당시 공해문제 연구뿐 만 아니라 청년, 학생들의 조직을 위한 모임터가 필요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근태 씨가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조직해 동분서주하는 것을 보면서 혼자 흐뭇해 했을 뿐이다. 

CCA-URM 실무자로 홍콩에서 일하다가 1989년도에 서울에 와보니 한국공해문제연구소는 많이 발전해 있었다. 이 단체는 1997년 ‘기독교환경운동연대’로 확대 개평되었다. 실무자였던 최열 씨는 1993년 따로 ‘환경운동연합’을 조직했다. 

당시는 모든 조직과 활동이 꽁꽁 묶여 있었기에 재정지원을 받기는커녕 종교집회 외에는 집회의 자유조차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하나의 장(장), 운동권의 작은 광장을 만드는 일에는 수많은 사람의 피나는 노력과 희생이 뒤따랐다고 할 수 있다. 오재식 선생이 조직한 사선은 그런 노력 중 하나였다.     
 
▲ 인도 URM 친구들과 인도 뭄베이에서

조직과 훈련, 그리고 수련회를 통한 사회운동권의 연대

오재식 선생은 일본 도쿄에 있으면서 여러 번 한국을 방문했다. 사선을 바르게 재정립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사선 총무가 된 후 재정문제를 정리하고 사선의 구심점이라 할 수 있는 실행위원회를 정비하고 분야별 조직훈련을 실시하는데 힘을 쏟았다. 노동자는 산업선교와 가톨릭노동청년회(JOC), 농민은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 빈민은 수도권, 학생은 가톨릭학생회와 기독학생연맹 등 분과별 훈련책임자를 선발해서 훈련시키고 조직가를 배출했다. 

이러한 것들이 사선에서 내가 한 가장 중요한 일들이다. 우리가 비용을 대고, 조직이 돌아가게끔 도왔다. 훈련에서 필요한 강사는 해직교수나 해직기사출신들로 정했다. 이영희, 장을병, 박현채, 현영학, 김찬국, 서남동, 안병무, 이문영, 문동환, 이만열, 유인호, 송건호, 이우정, 이효재, 고은, 백기완, 장상환 등 많은 사람들을 강사로 불렀다. 

한편 어떻게 하면 빈민, 노동, 학생, 청년,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등 많은 운동권이 함께 어울리는 장을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정기적으로 수련회를 실시하기로 했다. 그래서 매년 여름과 겨울에 수련회를 진행하여 모든 운동권이 모일 수 있도록 했다. 연말에는 송년회 자리도 마련했다. 

사선은 명실공이 신교구 연합기관이었기 때문에 종교집회 외에는 모든 집회가 금지된 상황에서도 종교모임이라는 명목 하에 자주 모일 수 있었다. 

각계각층이 함께 하는 민주화운동의 광장인 수련회의 인기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많은 인원이 모이는 터라 장소를 섭외하는 것도,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일도 힘들었지만 모두 관심을 갖고 수련회 개최를 지켜봤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준비할 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수련회는 캄캄한 밤에 모든 정보를 나눌 수 있는 장이 되어 주었다. 

여름수련회는 보통 동해안이나 부산 등의 바닷가에서, 겨울수련회는 수녀들이 운영하는 미아리 아리랑고개에 있는 수도원이나 장충동의 분도회관, 부산의 수도원, 왜관수도원 등 가톨릭 기관에 신세를 많이 졌다. 

수련회가 열릴 때마다 참가자들이 점점 많아졌다. 청년들은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할 것 없이 이 모임을 통해 나라의 미래와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경제학자 박현채 선생이 신이 나서 참가하던 모습도 기억난다. 

여름수련회는 500명씩 모였는데, 주로 1박 2일이나 2박 3일 동안 진행되었다. 이 수련회 모임이 얼마나 기억에 남았는지 시간이 꽤 지난 후에 어떤 사람이 공식 석상에서 당시 수련회를 추억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기도 했다.
 
<1970년대 노동현장과 증언> 자료집 발간 

산업선교 25주년 기념대회를 앞두고 가장 시급한 일은 25주년 자료집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 대회는 KNCC와 수도권, 사선이 공동으로 준비했는데, 자료집 발간이 가장 큰 문제였다. 

당시는 자료집 발간이 어려울 때였다. 이 문제를 천영초 간사에게 말했더니 그는 염려하지 말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솔직히 자료집을 내는 것도 불가능해보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천 간사가 자료집 발간에 대한 계획서를 작성해왔다. <동아일보> 해직기자인 성유보 선생에게 집필을 부탁하고, 자신이 돕기로 한다는 계획이었다. 

만일 사선이 마련한 수련회 같은 광장의 연대의식이 없었다면 성유보 선생에게 부탁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구체적인 계획을 묻지 않았다. 아니, 물을 수도 없었다. 그저 천 간사를 믿고 아주 좋은 계획이라며 쾌히 승낙해주었다. 그 뒤 천 간사는 그 일에 전념했고, 성유보 선생과 함께 막대한 자료집을 삽시간에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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