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굴산의 솔바람 소리 들으며 내 어린 시절은 막을 올렸다. 어느 누가 그러지 않을 까만 나는 강보에 싸인 채 할머니와 큰할머니 손에 릴레이식으로 건너다니며 컸다. 모처럼만에 얻은 손자라 할머니들의 온갖 정성이 나에게 쏠렸다. 이리하여 할머니들의 무릎은 나의 안식처가 되고 등은 편안한 요람이 되었다.
두 할머니는 서로 손자의 체취를 밀도 짙게 맡으려고 내가 더 손자의 재롱을 눈에 넣어 보리라 하고 이 선의의 경쟁으로 세월 가는 줄 모르셨단다. 그 어른들의 두 눈으로는 내가 금지옥엽으로 보였고, 내 금속성의 높은 울음소리도 싱그러운 풍악으로 들리셨단다. 선의의 경쟁 때문에 나는 젖을 먹을 동안만 겨우 어머니 품에 안겼을 뿐, 늘 두 할머니의 등과 가슴이 포근한 안식처가 되었다.
바람이 불어도 천둥이 쳐도 손자가 경기증(驚氣症)이 일어날까봐 늘 두 손 모아 하늘에 비셨다. 내가 있기에 우리집안이 꽉 차고 내가 있기에 우리 집안에 화기가 감돈다고 반죽이 좋게 되뇌셨다.
한편으로는 선의의 근심도 하셨다. 내가 서너 살 때부터 짓궂게도 어른들의 호칭을 내 맘대로 만들어 불렀기 때문이었다. 큰할머니를 ‘망구할머니’라고 부르고, 어머니는 ‘항가야’, 막내고모는 ‘함나’, 고종제는 ‘아야’, 고종자는 ‘아와’, 옆집 여자아이는 ‘망아’로 불렀기 때문이었다.
7년만의 종손인 내가 이렇게 맹랑하게 구니 사람 안 될 것 아니냐고 은근히 걱정하셨다. 그것은 사실 유아심리학에서 보면 누구나 언어발달단계에서 일어나는 자연현상인데 기우이셨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세 살에서 여덟 살 사이에 엄청난 재난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내 오십 평생에 이른바 삼재(三災) 내지는 신상변화가 거의 10년 주기로 일어났는데, 이때 그 첫 재난의 테이프를 끊었던 것이다.
이 사이에 불면 꺼질까, 쥐면 터질까 하고 나를 애지중지 키워준 두 할머니가 이승을 떠나셨다. 큰 할머니는 1946년에, 친할머니는 1944년에, 철부지인 나야 그 슬픔을 알 턱이 없었지만, 우리 가정에서 두 할머니가 차지하셨던 그 울안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그 슬픔도 용마루까지 흔들었단다.
나는 두 할머니가 그렇게도 바라고 그렇게도 기뻐하던 손자였다. 내가 아직도 동서조차 분별하지 못하던 때에 나를 두고 홀홀히 떠나신 두 할머니의 발길이 얼마나 무거웠겠느냐는 생각을 하면 이미 희수인 나로서는 두 눈에 찔꺽 뜨거운 이슬이 맺혀온다.
바로 이와 때를 전후해서 우리 집에는 곰비임비 또 재난이 찾아왔단다. 그것은 내가 무서운 괴질에 걸렸기 때문이란다. 며칠 동안의 무서운 배앓이로 숨이 껌뻑껌뻑 넘어갈 듯 하며 신열이 나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단다. 온 식구가 혼비백산하여 좋다는 처방은 다 써보았지만 백약이 무효였고, 병은 날이 갈수록 위독해져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단다.
비손을 하고 점을 치는 등 별의별 수단과 방법은 다 동원했으나 얻은 것은 실망뿐이었다고 한다. 일이 이렇게 되자 어머니는 이 모든 빌미가 자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소장들께 송구하고 집안어른들께 미안하여 거의 침식을 잊고 내 간호에 열과 성을 다 하셨단다. 그러던 중 할아버지의 최후 서단의 제의로 민간전래비법인 아편을 극히 미량을 접시 물에 타서 나에게 먹였단다.
어린 나에게 이 극약을 쓸 때는 비장한 각오를 했단다. 아직 어린 나에게 그런 극약이 천부당만부당 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참으로 기절초풍할 일이 일어났다. 그 아편을 먹자마자 나는 정말 거짓말처럼 복통이 멎고 금방 얼굴에는 화색이 감돌았다. 누가 양극(兩極)은 가장 멀면서도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했던가. 그 무서운 극약이 어린 생명을 구해냈으니 이보다 더 신통방통할 수가 또 어디 있겠는가.
사경에서 깨어난 내 얼굴을 보자 가족들은 이것이 다 조상님들의 음덕이며, 저 허굴ㄹ산 산신령의 음덕이라고 여기고 저마다 몰래몰래 두손을 모았단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고인이 되신 할아버지, 두 할머니와 아버지를 생각하며 멀리 남쪽 하늘과 용미리를 바라보곤 했다.
나는 이런 중병을 앓고 난 뒤 초등학교 들기 전의 나이에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웠다. 아무 뜻도 모르면서 그저 암기식 교수법에 의해 천자문을 배웠다. 코찔찔이인 나는 놀기 바빠서 그 <천자문>읽기를 게을리 했다. 원체 나이가 어린데다가 뜻도 모르고 무조건 암기만 하는 공부였으니까 재미를 못 붙였다. 그러니 할아버지가 강(講)을 받을 때 그 <천자문>을 좔좔 외우지 못했다.
“이놈, 또 어제 배운 것 다 까먹었구나. 회초리 가져오너라. 종아리 좀 맞아야겠다.”
“할아버지 <천자문>을 펴 보십시오. 무슨 자든 가리키면 다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듣자 할아버지는 내 말뜻을 얼른 알아채지 못하셨단다.
“이놈, 책을 보면 그 글자를 안다고 했겠다.”
“예, 한번 물어보십시오.”
이리하여 할아버지가 <천자문>을 펼쳐놓고 한 글자를 가리키며 무슨 자냐고 물으면 나는 앙증스럽게도 잘도 맞게 읽었단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이상하신지 연신 고새를 갸우뚱거리셨단다. 외지는 못해도 글자를 보고는 한자도 틀림없이 읽는 손자가 무슨 조화냐고 여기셨다.
사실 그때 천자문의 한자(漢字) 달아놓은 한글을 보고 읽었으니, 한 자도 틀리지 않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천자문을 배우기 전에 나는 이미 한글을 깨치고 있었다. 고모님이 한글을 배울 때 어깨너머로 그 한글을 깨쳤다. 그러나 할아버지께서는 그 비밀을 전혀 모르셨으니 한편으로는 대견하고, 한편으로는 의아하게 여기셨다.
나중에 이 비밀을 아신 할아버지는 당신을 속인 손자를 나무하지 않고 되레 정식으로 가르치지도 않은 한글을 어께 너머로 깨친 그 총기가 대단하고 기특하시다며 내 머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으셨다. 그리고 늘 골목에서 개구쟁이로 천방지축 놀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언제 한글까지 깨쳤나 하고 백령백리(百怜百俐) 하다는 찬사와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세월이 흘러 그동안에 강산이 네 번도 더 변했지만 나는 그 이야기가 지금도 파노라마처럼 되살아나 할아버지의 무덤 앞에 머리를 조아릴 때마다 구수하던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상기하며 그때의 잘못을 사죄한다. 이 선의의 속임수가 내 평생을 두고 큰 오점을 남긴 듯 지금도 내 가슴을 메아리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