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욕이 엇갈린 공직생활의 마무리...

세월은 다시 흘러 1988년이 되었다. 이해 2월 25일에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하며 마침내 제6공화국이 출발했다.

9월 17일부터 161개국이 참가한 서울올림픽대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이 해 2월초 지방청 순시에 나섰다. 2월 25일의 노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장관들이 바뀔 것이라며 불안에 떨고 있을 때다. 나의 지방순시를 우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설령 그만둔다하더라도 그만두는 날까지는 맡은바 책무를 다하기로 했다.

내가 부산지방청으로 내려갔을 때다. 청사에 이르니 뜻밖에도 정문 앞에 청장 이하 직원들이 도열을 하여 마중을 했다. 참으로 뜻밖이었다. 대개 공직자 몇 사람이 마중을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나는 지나가지 않을 수 없어 맨 앞줄의 직원들과 악수를 나누며 지나게 되니 자연 군대의 사열식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격으로, 그것이 주목이 되어 내 본의는 아니나 신문의 ‘가십거리’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기자들 앞에서 지방청장의 지나친 환영작태를 나무랄 수도 없었다. 나는 그날 실로 남의 ‘어른’되기가 이렇게도 어려운가, 하고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자탄을 금하지 못했다.

한편 2월 25일, 6공이 드디어 출발하게 되자 의례적인 개각이 있었다. 많은 사람의 얼굴이 바뀌었다. 대대적인 물갈이였다. 나는 3월 15일자로 재임용되었다. 참으로 많은 행운을 차지했다.

“이번에 재기용이 된 분들은 장관 승진 이상으로 영광스럽게 여기고 각자 맡은 바 소임에 더 한층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모처로부터 결려온 축하와 격려의 전화였다. 사실 그러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지만, 나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다시 한 번 봉사할 것을 새삼 마음속으로 굳건히 다짐했다.

재기용이 된지 불과 2개월 여인 5월 23일이었다. 그날 마침 부부동반의 저녁 초대가 있었다. 나는 외출준비를 하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텔레비전에서는 분명 환경청장이 바뀌었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사전에 아무런 연락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대뜸 얼굴이 상기되며 이 거짓말 아닌 현실에 어리둥절해졌다.

허탈감과 상실감이 다발이 되어 일시에 나를 엄습해왔다. 아무리 마음을 짚어보아도, 그만두어야 할 큰 빌미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저 맥이 탁 풀리고 어깨가 축 쳐지면서 꼭 남에게 호되게 두들겨 맞은 것같이 전신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러나 나는 태연을 가장했다. 내자에게 일언반구 내색을 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초대장소로 나갔다.

발걸음은 아무리 정신을 차려도 허둥대기만 했다. 물론 그 초대석에서도 처음엔 일체 발설하지 않았다. 고량진미의 융숭한 대접이었으나 꼭 모래알을 씹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모임의 마지막에 가서 그 사실을 넌지시 비쳤다. 내자를 위시해서 다들 입을 벌리며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내가 집으로 돌아오니 차장(次長)을 비롯한 간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내일 9시 10분에 이임식을 할 테니 차질 없이 준비해달라고 했다.

목민관(牧民官)은 발령이 나 그만두게 되면 한시를 지체 말고 그 직을 떠나라.

-목민심서

이리하여 나의 이임식은 예정대로 그 이튿날 9시 10분에 조촐하게, 아무 부담 없이 끝났다. 간부들과의 조촐한 송별연도 끝났다. 모든 것이 끝났다. 그야말로 만사휴의(萬事休矣)였다.

▲ 광주환경청 방문 시 담양의 소쇄원 방문(1988.)

며칠 뒤 환경과학협의회 회장단이 꼭 송별연을 열겠다며 정겨운 기별을 보내왔다. 이를 정중히 사양하다가 3번째에는 마침내 지고 말았다. 이 송별연이 끝나고 헤어질 때였다. 환경공학을 전공한 김이열(金伊烈) 중앙대 학장이 손을 꼭 잡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위로해주었다.

“박 청장, 난 교육자이기에 인간평가를 할 떼에도 그 근성이 뻔질나게 드러나, 점수화하는 경향이 있다오. 박 청장에게는 무가 뭐래도 재임 중 성적을 200점 드리고 싶습니다. 100점이 아닌 200점 말입니다. 병법(兵法)은 노병(老兵)만이 압니다. 유능하신 박청장이라 반드시 앞으로도 국가에 봉사할 기회가 있을 줄 믿습니다. 그동안 댁에서 쉴 때에도 90점 이상의 우등생이 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나에 대한 이 분의 인간적인 격려와 눈물겨운 위안에 대해 깊이 감사를 드렸다.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하늘을 우러러 크게 숨을 몰아쉬면서 그 90점을 받기 위해 내 나름대로의 결심을 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환경청장 재임 2년 동안을 돌이켜보았다., 자랑이 아니라 대과(大過)없이 그 많은 일을 성공리에 수행했다고 자부했다. 부지런히 전국을 누비며 국토의 정화를 위해 스스로 삽질을 한 그때의 일을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로써 영욕이 엇갈린 파란만장의 공직생활에서 풀려났다. 한 자락의 해방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뭔가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하랴! 생각해보면 그동안 강산이 두 번도 더 바뀌었고, 내 화사(華奢)한 청춘도 오로지 공직의 희생양이 되었다. 어느 때는 수령으로 빠지는 조국을 붙들고 울었고, 어느 때는 단비 맞아 피어나는 겨레와 얼싸안고 기뻐했다.

나에게 천하를 명령할 수 있는 지휘봉을 쥐어주었을 때도 나는 결코 이름 없는 농부의 아들임을 잊지 않았다. 부귀가 황금마차를 대령하고 행복을 여는 열쇠를 나에게 주어도 나는 과감히 그 유혹의 포로가 되지 않았다. 고목은 입지 않아도 해마다 새순을 내고, 들국화는 다듬지 않아도 청순한 내음을 뿜는다는 진리를 종교처럼 믿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고독한 영웅처럼 대아(大我)와 더불어 살았고, 조상의 그 맑은 피를 욕되게 하지 않으려고 쓸개를 씹었다. 그러기에 공직자의 제복을 벗는 마당에도 나를 자랑할 수 있는 그 이름 석 자만 낼름 들고 내 집으로 돌아왔다.

아, 낙향했던 선비처럼 고향을 갈거나! 선영들이 고이 잠든 상자지향(桑梓之鄕)이 그립구나!

동쪽 울 아래 국화를 따다가

멀리 남산이나 볼거나

-도연명의 음주(飮酒) 중에서

오두미절요(五斗米折腰)가 싫어 팽택(彭澤)의 방백(方伯)을 그만 둔 도연명(陶淵明)처럼, 음주가를 읊으며 고향의 안산(案山)이나 바라보고 유유히 보낼까.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라도 절로절로 / 산 절로절로 수 절로절로 산수 간에 나도 절로절로 / 그 중에 절로절로 자란 몸이니 / 늙기도 절로절로 하리라

그러나 그 하늘에 먼지가 날고 산천이 깨어져 물도 공기도 그대로는 못 마시게 되었으니 낙향도 부질없는 일이구나! 내 희수의 얼굴을 책임지기 위해서라도 두더지처럼 엎드려서 만권서(萬卷書)나 펼치며 제2의 출발을 꿈꾸어 보자. 그리하여 내 남은 4.4분기에 여태까지 빚진 모든 빛을 다 반제(返濟)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