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진학 (9화)

내 인생의 첫 번째 실패

지금은 입시문제로 초등학교부터 경쟁사회로 변질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그렇지는 않았다. 지방에는 학원도 없었고 학교에서 과외도 없었다. 학교수업으로 만족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고등학교 입학원서를 쓰는 조건이 좀 까다로웠다. 지방에서 전주고등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우등생 정도가 되어야 원서를 써주었다. 남원중학교에서 6명이 시험을 보았는데, 4명은 합격하고 2명은 떨어졌다. 그 탈락자 중 한명이 나이다. 합격발표 게시판에 내 이름이 없었다.

함께 간 친구들의 위로가 있었지만 나는 자리를 피했다. 자존심은 좀 상했으나 패배감으로 상심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직 철이 없었던지 아니면 좀 모자랐었는지는 모르겠다. 내 생애에서 처음 실패했는데, 그냥 담담했다. 순진했던 것일까?

호기심으로 입학하게 된 고등학교

첫 번째 시험에 실패하고 망설이다가 후기 2차인 전주상고 입학시험에 응시했다. 집에서는 삼촌들도 다 금융계에 있으니 상고를 나와 취직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권유에 상고에 입학원서를 내고 합격을 했다. 합격통지서를 받고 보니 마음에 여유가 생겨 전주시내를 구경하고 싶은 호기심에 택시를 타고 지금의 다가공원에 갔다.

다가공원에서 내려다보이는 전주시내는 남원 촌놈인 나에게는 엄청나게 크게 보였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지금의 성심중고등학교의 빨간 벽돌집이 인상적이었다. 둘러보니 숲이 우거진 바로 옆에 예수병원, 그 밑에는 신흥중고등학교와 바로 위에 기전여학교의 빨간 벽돌집이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호기심으로 신흥학교를 둘러보고 있는데, 저쪽에서 풍채가 좋으신 분이 나를 보고 어찌 이곳에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순진한 마음으로 상고 합격통지서를 보이면서 시간이 있어서 이곳에 구경왔노라고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학교가 너무 아름다워 이런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분께서 중학교에 가서 입학원서와 성적증명서를 함께 가져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날 중학교에 가서 입학원서와 성적증명서를 가지고 그 다음 날 올라와 그 선생님을 찾아갔다. 성적표를 보고 무시험으로 입학을 시켜주었다.

알고 보니 그 분은 장평화 교장 선생님이셨다. 이렇게 되어 나는 개신교 미션학교인 신흥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학급은 2학급이었는데, 교장선생님의 특배로 나는 1반에 배정받았다. 남원중학교를 같이 졸업한 학생도 3명이나 다녔다. 자존심 상한 일이지만 중학교에서 대장놀이하다 이곳에 오니 그것이 통할 리 없었다.

▲ 친구들과 다가공원에서 / 앞줄 왼쪽이 필자이다

조회 때 운동장에 모이면 우리 반에서 내가 맨 앞에서 1번 아니면 2번이었다. 나보다 덩치도 크고 잘 나가는 놈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좀 받았다. 나중에는 그들과의 교우관계가 원만했지만 촌놈이 도시에 와보니 밀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별다른 사고 없이 잘 적응하여 학창시절을 지냈다.

나는 천주교 신자인데 아침마다 예배시간이 있어 불편했다. 일주일에 목사님 교리시간이 1시간씩 있었지만 잘 적응하고 3년을 무사히 지냈다. 되돌아보니 이런 시간도 나의 성소의 길에 보탬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술을 즐겨했던 하숙생활

나의 놀이무대는 주로 다가공원이었다. 하숙도 주로 다가동에서 했는데, 지금의 관광호텔 근처와 전주에서 유명한 은행여관이 있었던 곳이다. 당시 다가교와 완산교 밑에는 넝마주이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때는 그들이 낮설고 무섭게 느껴졌다.

여름밤에 완산교 밑에서는 목욕을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가끔씩 여자들 목소리도 들렸다. 밤에 빨래를 하러 온 것은 아닐텐데...

주로 학년에서 나이가 많은 나와 같은 또래와 친했다. 하숙집을 옮길 때는 친구들과 손수레로 함께 도와주고 저녁에는 막걸리 파티도 했다. 학생신분으로 좀 심한 행동이었지만 사고를 칠 정도는 아니었다. 모두가 학급에서는 모범생이었다.

나는 술은 좀 일찍 배웠다. 우리 집이 양조장이었기 때문에 초등학교 때부터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술이 익을 때 나는 달콤한 냄새는 향기에 가깝다. 나는 이런 유혹을 이기지 못해 나보다 키가 큰 술독 주위를 맴돌았다. 기발한 생각을 하고 내 아랫동생과 합작하여 일을 저지르곤 했다. 동생을 엎드리게 하고 내가 등을 밟고 올라가 바가지로 퍼내 조금씩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달콤한 술에 취해 몇 시간이고 취해 골방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주사로 남에게 불편함을 준 일은 없다. 이때부터 술맛을 알았으니 좀 특별한 경우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담배는 아직까지 입에 댄 적이 없다.

소리에 민감한 히스테리

나는 하숙집 밥은 좀 까다롭게 고르는 편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조용한 것이 첫째였다. 음식은 소탈했지만 룸메이트도 조용한 사람을 골랐다.(그때는 한 방에 2명)

경제적으로는 좀 여유가 있었다. 아버지에게는 정식 청구액을 수령했고, 어머니에게 따로 챙긴 액수도 만만치 않았다.

고등학교 때 조용히 지낸 편이었다. 여름방학에는 암자에서 지낸 일이 많았다. 어머님께서는 중이 되려고 암자에 가느냐고 핀잔을 주셨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조용한 것을 좋아하고 산수를 가까이 하면 마음이 편했다. 말하자면 소리에 민감했다. 여행을 가면 잠자리가 상당히 예민하다. 지금도 조용한 시골이나 산사의 풍경소리가 좋다.

그런데 나는 서양 중이 되고 말았다. 세상은 조용한 곳보다 시끄러운 곳이 많아 내가 있을 곳이 좁아졌다. 지금 내가 있는 곳도 시끄러움을 피해 왔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조용한 곳은 무덤 속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