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분리에서 살던 어린시절, 좋은 기억으로는 서당에서 천자문 공부하던 일, 명절 때 어른들에게 세배 다니던 일, 뒷동산에서 비료 푸대로 썰매를 타면서 놀았던 일, 동네 아이들과 팽이치고 딱지를 치던 일들이다.
우리집은 대농이어서 가을엔 원두막에서 참새 쫓는 일을 했다. 간식으로 옥수수와 감자도 구워먹고, 늦가을에는 메뚜기를 잡아 반찬상에 올렸다. 개울에서 미꾸라지를 잡아 고무신에 담아 놀았다. 논두렁을 지나다가 뱀을 보고 놀라서 그 자리는 피해 다녔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뱀은 나에게 혐오스럽다.
한번은 논에 발이 빠져 거머리에게 피를 빨려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이곳저곳에서는 새를 쫓기 위해 우여우여 소리를 내면서 깡통을 두드려 가을 들녘은 시끄러웠다. 당시 형들을 학교에 다녔고, 나는 미취학이었기 때문에 새 보는 일을 많이 했다.
할아버지의 신앙교육
저녁식사가 끝나고 취침 전에 가족이 모여서 30분 정도 저녁기도를 올렸다. 어찌나 졸리는지 고개를 떨구는 때가 많았다. 할머니는 초저녁잠이 많아서 졸다가 할아버지의 헛기침 소리에 고개를 바로 세우곤 했다. 어린 우리들은 졸다가 할아버지에게 야단도 많이 맞았다. 모두가 노동일로 피곤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주일이면 의무적으로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여했다. 지나고 보니 할아버지 밑에서 받았던 신앙교육이 내 신앙생활의 기초가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선친들의 신앙교육에 감사할 따름이다.
총기사건
1945년, 해방은 맞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치안은 엉망이었다. 낮에는 치안군이 치안을 담당했으나 저녁이 되면 빨치산들이 마을에 내려와서 양식과 필요한 것을 약탈해갔고, 사람을 해치기도 했다.
곡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마루 밑에 독을 묻고 쌀을 숨기고 그 위에 장작을 쌓아 위장했다. 저녁에 빨치산들이 어머니에게 쌀을 내놓으라고 총구를 겨누며 위험을 할 때 내가 그 앞에서 큰 울음을 터뜨려 발길질을 당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저녁에 위험을 느낄 때면 은밀한 곳에 파놓았던 방공굴에 숨어 있던 공포의 시간들이 생각난다.
당시 큰형은 동네 치안군이었다. 하루는 장총을 가지고 와서 작은 방 모퉁이에 세워두었는데, 실탄이 장착된 줄도 모르고 호기심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다행이 인명사고를 없었지만 총알이 천장을 뚫고 나가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후부터 나에게는 기계 콤플렉스가 생겼다. 지금도 기계 만지는 일에 두려움이 많다. 지금 사용하는 휴대폰도 10년이 넘은 구식이고 기계조작이라면 운전하는 것이 유일하다.
어머니의 시집살이
어머니가 시집살이 할 때는 모든 것이 수작업이었다. 동네 어귀에 물레방아가 있었는데, 어머니는 낮일을 하고 밤에는 방앗간에서 보리를 찧는 일을 하셨다. 나는 등불을 켜서 물레방앗간을 찾아가서 어머니를 도와드리기도 했다. 저녁 늦게야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어머니는 얼마나 고달팠을까.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낮에ㅐ는 가끔씩 디딜방아로 방아를 찧던 일도 생각난다.
이것뿐이랴. 저녁에는 삼베 길쌈으로 베틀 위에서 저녁 늦게까지 베짜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그때 여인들은 그 엄청난 일을 하고도 힘들다느니 피곤하다느니 라고 말 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을 감당했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나는 아직도 그 답을 알지 못한다. 우리집은 대농이고 식량걱정은 안 하고 살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어머니는 부러운 며느리였을지도 모른다.
논과 밭이 많아서 바깥사랑채에는 머슴이 있었고, 농사철에는 부엌일을 도와주는 도우미도 있었다. 수분리에 어머니의 삶은 당시의 모든 여인들의 고달픔을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어느 노래 가사를 듣다보니 당시 여인들의 다급한 모습이 묘사되어 적어본다.
소낙비는 내리구요, 업은 애기는 보채구요.
허리띠는 풀렸구요, 광주리는 이었구요.
소꼬팽이 놓쳤구요, 논에 둑은 터지구요.
치마폭은 밟히구요, 시어머니 부르구요.
똥 오줌은 마렵구요, 아! 이 일을 어쩌나.
아버지는 돌부처
어머니는 대식구를 거느리는 부잣집 맏며느리의 고달픈 삶이었지만 아버지는 번암면 사무소에 다녔기 때문에 주일에만 다녀가셨다. 술을 좋아하셨고, 본래 농사일에는 관심이 없으셨다. 알사탕을 사먹으라고 용돈을 주셨을 뿐, 아버지와의 특별한 추억은 생각나지 않는다.
말이 없으셔서 어린 내가 가까이 하기엔 어려운 존재였다. 당시는 누구나 다 그렇게 살지 않았나 생각된다. 아버지 손을 잡고 걸어본 적도, 추억에 남는 정다운 말 한마디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를 보고 돌부처라고 하셨다. 나도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말이 적은 사람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부쩍 그렇다. 부전자전인가?
번암면으로 이사
우리는 수분리에 살다가 내 나이 여섯 살 때쯤 아버지가 계시는 면사무소 근처 초가집으로 다시 이사를 했다. 두 번째로 분가한 것이다. 전깃불이 들어오고 바로 옆에는 면사무소 넓은 마당이 있었다. 집 앞에는 작은 개울도 흘렀다. 위로 형들은 초등학교에 다녔고, 나는 취학 나이가 모자라 동네 개구쟁이들과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렸다.
아버지는 면사무소 호적계에 계셨다. 아버지 자리가 창문 옆에 있었기 때문에 유리창이 열렸을 때는 까치발을 하고 기웃거리면서 용돈으로 알사탕 값을 자주 얻어내었다. 알사탕이나 제비뽑기는 아이들이 인기여서 나는 동네에서 목에 힘을 주고 다녔다. 공무원이라고 하면 면사무소, 지서(파출소), 초등학교 우체국뿐이었다. 특히 면사무소 공무원에게는 배급을 주었는데, 그때 귀한 설탕을 처음 먹어보았다.
이곳에서 살아가는데 큰 불편함이 없었으며, 어머니는 고달픈 농촌의 살림살이에서 벗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