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군사정권 철권통치의 결정체였던 3선 개헌을 반대하는 삭발데모 당시 내가 맡았던 구국 철야기도회 강론을 적어본다.
- 구국철야 기도회를 시작하면서 -
존경하는 신부님 그리고 동료 신학생 여러분!
지금 밖에는 어두움과 함께 찬바람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곳은 바깥세상과 전혀 다르게 아무런 동요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빛 아래에서도 눈으로 볼 수 없는 우리들 가슴 속의 내적 갈등은 밖의 저 어두움보다도 더 짙고, 찬바람보다도 더 세차게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밤 이 자리를 빌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정치현실 속에서 우리들의 내적 갈등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오늘 어떤 후배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귀중한 시간을 들여서 철야기도를 할 필요가 있습니까? 또 이 기도회는 학교에서 허락한 것입니까? 아니면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까? 저는 이 말을 듣고 너무나도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기도회가 시작되기 전 각 학년에서 한 시간 동안 토론을 거쳐 우리들의 뜻에 함께하는 사람들은 동참해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분명이 말씀드립니다. 우리들의 젊음과 양심의 부르심에 따른 자발적인 것임을 분명히 밝혀 둡니다. 이 시간 이후로는 이런 일로 오해가 없기를 바라며, 뜻을 같이 한 동료들은 함께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하며 신학교에 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만민에게 선포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학교에서 하고 있는 이 생활이 진정 하느님의 말씀대로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의, 전부인지 한번 생각해볼 사안이라고 판단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배우는 학도로서 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살펴보는 진지한 자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철야기도가 우리들 자신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진정한 이웃이 누군인지 살펴보고 그 이웃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나와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그리고 내가 이웃에게 할일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현 유신정부는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해 있으며 유신군부독재는 국민들의 숨통을 조이고, 언론은 정부의 시녀가 되어 아무런 말 한마디 못하고 모두가 총칼 앞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젊은 대학가에서는 이러한 불의 앞에서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서울을 비롯한 전국으로 데모 시위가 번지고 있습니다. 유신정부 독재정권 아래 인권이 무참히 짓밟히고 유린되는 이 시점에서 전국의 대학생들은 독재정권의 만행을 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현 정부는 반성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젊은 동료들을 강제 구금 체포하고, 때에 따라서는 재판도 없이 행방불명되는 일도 있다고 합니다.
군사정권에서나 있는 일이지 자유민주국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여 이러한 일을 보다 못한 젊은 청년 대학생들이 학교를 뛰쳐나와 그들의 의사 표시인 시위를 하는데, 최루탄을 쏘아 학생들을 해산시키고 또는 구타하여 인권을 유린한다고 합니다. 이런 현장을 목격한 대학생들은 부정과 맞서 투석전까지 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동료 대학생들이 하는 일이 정당하다고 생각될 때는 우리도 어떤 모습으로든지 그들이 하는 일에 힘을 보태주는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 일을 하기 위한 지혜를 모으고 힘을 모으기 위해, 그리고 양심의 소리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 이 자리가 마련된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일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마음의 무장을 철저히 해두자는 것입니다.
저는 일전에 대학신문 여론조사에서 이런 내용을 보았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종교 중에서 현재의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종교를 순위별로 나열한 것이었는데, 천주교가 제일 우선순위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그만치 우리가톨릭에 희망을 걸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젊은 대학 동료들의 희망을 저버린다면 우리는 참으로 이웃의 불행을 보고 무관심해 버리는 비겁한 신학도가 될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는 학교 기숙사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과 고통을 함께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외면하는 것이 되고, 그러면 그들도 우리를 외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신학생이라고 해서 밖에 있는 사람들의 일에 무관심하거나 무기력해서는 안 됩니다. 이 순간에도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가 감옥에 갇히고, 권력과 폭력 앞에 대항하다가 고통을 당하는 젊은 동료 대학생들이 바로 누구입니까? 여러분들은 사마라인의 내용을 잘 알고 게실 것입니다.(루가 10, 25-37)
그들이 바로 우리의 이웃이요, 형제요, 동료입니다. 한 차원 높여 신앙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은 매 맞는 그리스도요, 헐벗은 그리스도요, 핍박받는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아무런 말 한 마디도, 아무런 동료애도 나타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너무나 위선적인 삶에 익숙해 있는 신학도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