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해서 내가 의지가 있었다면 진학할 수도 있었는데 사업관계로 집안 눈치만 보다가 시기를 놓쳤다. 당시 우리 동네 친구들 중에는 대학에 진학한 친구가 없었다. 대학에 가야 한다는 자극도 없이 기회가 되면 취직하는 방향으로 분위기가 흘러갔다. 나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특별한 목적의식 없이 어울리다가 보니 2년이라는 세월을 집에서 지내고 말았다.
같은 동료들과 4H운동에 가입해서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데만 마음을 빼앗겼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생활에 중심을 잃고 술집 출입도 잦았고, 부모님 마음을 아프게 한 일도 있었다.
겨울엔 이웃집 닭서리 하다가 혼쭐난 적도 있지만 아주 지능적인 방법만 동원했다. 친구 집만 골라서 닭서리를 하고 먹을 때에는 그 친구를 불러 같이 즐겼다. 이쯤 되면 그날 닭서리는 성공한 것이다. 그때 함께 했던 친구들의 이름을 대면 사회적으로 이름을 알 만한 사람들도 있다.
숨기고 싶은 일
학교를 졸업한 그 해에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신장 미달로 면제 판정을 받았다. 그래서 친구들끼리 군대 얘기만 나오면 나는 할 얘기가 없어 기가 죽는다. 다른 친구들보다 3년이라는 세월을 벌었지만 그 기간 동안 특별히 내놓을만한 일도 하지 못했다.
졸업하고 3년 동안 잠깐의 농사일을 지켜본 것과 서울에서 외사촌 매형 사업을 도와 외판원으로 있었던 것이 전부이다. 당시는 방위 근무도 없었다. 국방의무를 다한 대한민국 장병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무전여행
이웃집 친구와의 일을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추억이 무전여행이다. 1960년대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했던, 말하자면 돈 안들이고 떠나는 여행인 것이다. 친구와 작당하여 집에 알리지 않고 돈 몇 푼 가지고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 남원에서 이리로 가서 거기서 목포까지 무임승차하고 목포에서 오전에 가야호 배를 탔다.
8시간에 걸쳐 해가 질 무렵 제주에 도착했다. 처음 탄 배라서 어찌나 배멀미를 했는지 먹은 것을 다 토해냈다.
첫날밤은 초등학교 교실에서 자고 이튿날 아무런 장비도 없이 한라산을 넘다가 해가져서 함께 오르던 동료들의 텐트신세를 졌다. 아무 준비 없이 동료 텐트에서 자다가 추워서 거적을 찾았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보았지만 추위에 배탈이 났다. 정말 무모한 도전이었다.
이렇게 밤을 새우고 겨우 한라산을 넘어 서귀포에 도착하여 여기저기 구경하였다. 밤이 되어 마음착한 천주교 신자를 만나 하룻밤 신세를 지기도 했다. 이렇게 5일을 떠돌아다니다가 집에 오니 꼴은 말이 아니었고 어른들의 꾸중은 오죽했겠는가.
요사이 신문에서 산행하다가 또는 캠프하다가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보면 아찔한 생각이 든다. 철없이 용감했던 시절 아찔했지만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가슴 아팠던 사회 첫 경험
철없이 지내다가 우리는 외삼촌이 계시는 전북 장수군 계내면 신동이라는 마을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논을 구입하고 농사일을 처음 경험하였다. 옆에서 외삼촌이 많이 도와주었지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일이 힘들어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서 외사촌 매형이 목수들이 쓰는 줄자를 만드는 작은 수공업공장을 하고 있었다. 나는 외판원으로 서울 시내와 전국 철물점에 물건을 대는 일을 맡았다. 그 덕분에 서울지리가 훤했고 전국 방방곡곡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
당시는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무허가 불법제작이었다.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서울생활이란 호기심으로 그 일에 동참했다. 솔직히 말해서 집을 떠난 것만으로도 내 삶에는 큰 변화가 왔다. 고생이 되었지만 젊음과 의욕으로 뛰어다녔다. 고객도 확보하고 수입도 괜찮았다.
하지만 여기에도 시련은 있었다. 불법제조라는 것을 알고 누가 나를 미행하여 경찰에 고발한 것이다. 어느 날 밤 파출소에 연행되어 수갑이라는 것을 찼다. 경찰은 제조공장을 대라고 추궁했다. 나는 말할 수 없었다. 말 하게 되면 매형 공장은 불법으로 고발을 당하게 되어 공장은 문을 닫고 모두가 형사 처벌을 받아야 하는 심각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사회의 어려움을 겪게 되는 순간이었다.
밤새 고민을 하다 보니 도움의 손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첫째 숙부님이 서울 조흥은행 본점에서 검사역으로 계셨다. 어렵게 전화를 연결하여 사정을 이야기 했더니 사람을 시켜 봉투 하나를 들고 왔다. 그때로는 상당히 큰돈이었다.
돈으로 파출소장과 거래하여 풀려나게 되었고 외사촌 매형은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았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외사촌 매형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는 다급한 심정에 부정한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 나로서는 그 길이 최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후회는 없다.
이 일이 있고 난 후에도 그 일에서 손을 떼지 못하였다. 외사촌 매형의 사업자금을 보태기 위해 집에서 돈을 가져가다가 서울 가는 버스 안에서 가방 바꿔치기로 상당한 돈을 잃은 적이 있었다. 이 일로 외사촌 매형 일에서 손을 떼고 다시 부모님 곁으로 돌아왔다. 사회 첫 경험으로 받은 아픈 사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