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선수 활동과 교회에 첫발 (6회)
  제1장 학창시절과 칡넝쿨

입학은 되었으나 입학금을 내지 못해서 입학한 후 두 주일이 지난 어느 날 교감 선생님에게 호출을 당했다. 요즈음 같으면 입학금을 내지 않으면 아예 입학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좀 낭만이 있었다. 그것도 아마 전쟁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입학금을 내지 못한 학생은 30여명쯤 되었다.

집에 돌아가서 입학금을 가져오라는 교감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어서 동생과 나는 가방을 들고 교문을 나섰으나, 집에 돌아가 보아야 입학금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안압지와 계림을 향해서 발걸음을 옯겼다.

나는 안압지 정자에 앉아서 물고기들이 노는 것을 내려다보거나 하늘 멀리로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면서 불현듯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끝없는 공상에 사로잡히다가 지루하고 허전한 느낌이 들어서 나는 반월성을 거쳐 계림에 들어섰다.
 
시원한 바람이 고목을 스치면서 불어왔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새소리가 들리고, 숲속에는 몇 사람의 아마추어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점심도 거른 채 그림 감상과 계림의 풍광(風光)에 몰입되어 몇 시간을 보냈다.
 
수업이 끝나서 집에 돌아가는 학생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하자 동생과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서도 부모님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달 후에 입학금 문제는 해결되었으나 2학기 공납금 납부관계로 몇 달을 1학기에 겪은 것과 동일한 일이 반복되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학교생활은 나로 하여금 공부와 멀어지게 했다.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나는 B반으로 배정받았다. 자존심이 상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F반을 우수반, A반을 열등반으로 하고, 나머지 4개 반은 일반 학생들을 고루 분반했다는 발표를 듣고서 너무 부끄러워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혔다.

이때 우리 B반을 담임 하신 최윤상 선생이 “1학년 때부터 장군의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까 조금도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3학년에 가서 자존심을 찾으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위로해주셨다.

그 말씀은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최 선생과는 3학년에 와서도 다시 담임으로 만나는 인연이 되었는데도, 나는 3학년 1학기까지 공부에 전념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공부보다는 오히려 운동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농구와 배구연습에 열중하고, 농구선수가 되어 김성제, 김영호, 박종섭, 이상철, 한성희 등과 경북 농구대회에 참가하여 우승을 했다. 이때의 운동연습이 고등학교에서도 운동을 즐기고 직장에서도 배구, 축구, 농구 선수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 경북중학교 농구선수권 농구대회에 참가하고 나서

이때 우리 집은 미추왕능 근방 ‘선돌배기 효자리’ 비석이 서 있는 바로 앞에 있었다. 1953년 12월 초순경 황남교회가 우리집 근처에 세워졌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기쁘다 구주오셨네’ 등의 성탄을 축하하는 찬송들이 확성기에서 울려 퍼지고, 교회에 장식한 휘황찬란한 크리스마스 트리를 본 작은 형이 호기심으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것이 실마리가 되어 목사님이 우리 집에 심방을 오신 것이다.

담임목사인 정찬준 목사는 6.25전쟁 때 평양에서 월남하신 분으로 인격이 매우 훌륭한 목회자였다. 목사님의 간곡한 권유로 오랜 세월 절에 다니시던 어머님이 작은 형을 불쌍하게 여겨 교회에 나가시게 되었다.

작은형은 어린 시절 배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수술이 잘 되지 못해서 그 후유증으로 배에서 진물이 나서 헝겊으로 만든 배띠를 늘 매고 다녔다. 신체의 성장이 잘 안 되고, 정신도 다소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서 작은형이 집밖에 나가면 동네 아이들도 따라다니고, 개들도 요란하게 짖어댔다.

그러나 마음은 한없이 순수하고 동생들을 누구보다도 아끼는 형이었다. 이런 형이기 때문에 할머니와 어머니, 아버지는 작은형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잘못을 감싸주려고 하셨다. 작은형이 교회에 나가니까 어머니는 그것이 고마워서 함께 나가시고, 두 사람 다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나도 어머니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게 되면서 유년주일학교 반사를 맡아 아이들을 지도하고, 감포 남교회와 부산 남교회에서 개최된 전국 기독교 하기 학생 수양집회에도 참석하는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이때의 작은 형과 어머니의 전도가 나를 30년 후 장로의 자리에 오르게 한 것이다.

3학년 2학기가 되면서 좌석 변경이 있었고, 내 옆자리에 이상호(李相鎬)가 앉았다. 이상호는 학년 전체에서 탑 클래스에 속하는 수재였다. 고등학교 학생들이 보는 영어참고서로 공부하고, 수학 참고서도 중학교 학생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어려운 책을 보고 있었다. 나는 이상호에게 자극을 받아 고등학교 입학문제를 심각한 장래의 문제로 생각하게 되었다.

집안 사정으로 볼 때 주간 고등학교는 진학할 형편이 안 되어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저녁에 공부할 수 있는 최선의 학교가 어디인가를 고민하다가 대구상고 야간부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야간부에 가야한다는 자조의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공부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소야(小野)영문법>과 <삼위일체> 등의 영어 참고서와 국어, 수학, 과학, 사회 등의 과목을 섭렵하고 방학이 되자 경북문화원과 대구 영수학원에서 영어와 수학을 배우고, 본격적으로 대구상고 입학을 목표로 시험공부에 매진했다.

 
  고도(古都)의 향기_2 (5회)
  대구사범학교 진학 (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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