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군사혁명이 일어났다. 4.19학생 혁명 후 질서를 잡지 못한 민주당 정부를 박정희 2군 부사령관이 중심이 되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했다.
반공을 국시호 제일의(第一義)로 삼은 군사혁명 정부는 사회 전반에 걸쳐 대혁신을 일으켰다. 언론을 통제하고, 깡패들을 소탕하고, 부패를 척결하면서 경제 제1주의로 지향하여 새마을운동과 고속도로 건설, 종합제철 등의 건설사업은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합법적이든 비합법적이든 군에 입대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군에 가야한다는 지시 때문에 나도 1961년 8월 8일 논산훈련소 28연대에 <0035679>의 군번으로 입대하게 되었다.
<해성클럽> 회원인 박종달, 정해걸, 장윤익, 그리고 경북고등학교 정해걸의 동기 박봉배, 대구사범 동기 김화이 등이 군번을 차례로 받아 한 소대에 들어갔다. 후반기 교육을 마친 후 101보충대와 28사단 보충대를 거쳐 정해걸은 포사령부로 배치되었고, 나와 박봉배, 박종달, 김화이는 사단 수색중대에 배치되었는데, 중대본부에서 중학교 동기생 김명우를 만났다. 중대본부의 공급계를 맡고 있었던 김명우는 나를 보자 무척 반가와 했다.
수색중대에 같이 배치된 친구들 중에서 박종달을 1소대로 배치되고, 나와 김화이가 2소대에 배치되어 소대장에게 전입신고를 하니 경주중학교 2년 선배인 정채화 선배가 소대장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정채화 선배는 만난 것을 매우 기뻐하면서 선후배란 말은 하지 말라고 했다. 소대의 상황실에는 동아대학 정치학과의 청주대학 체육학과에 재학하다 학보 군번으로 입대한 성행웅 일병과 박찬하 일병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00군번들에게 동류의식을 가지고 매우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00군번은 단기제대가 되는 학보와 교보에게만 붙이는 군번이다.
나는 신원조회가 돌아올 동안 비무장지대에 들어가는 검문소에서 근무하다가 한 달 후에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7GP의 근무요원이 되었다. 우리의 근무복장은 검은색 완장에 흰색으로 헌병, MP, 모자에도 헌병, MP, 가슴에는 민정경찰을 부착한 것이다. 일체의 계급장과 명찰은 붙이지 않았고 점호와 내무사열이 없는 최전방이 우리의 근무지였다.
하루 한 번씩 물을 길어오는 것과 포대경으로 적 전방을 두 시간 정도 돌아가며 관측하여 보고하는 것, 그리고 밤에는 참호에서 2시간 반 정도 보초서는 일이 일과의 대부분이었다.
시간이 많기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일본어 첫걸음>과 펄벅 여사의 <북경에서 온 편지(Letter From Peking)>,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원서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집으로 보냈다. 부쳐온 책으로 일본어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하고, 영어소설 원서 두 권을 정독했다.
당시 7GP에는 한양대학교 원자력학과 유시징, 건국대학교 축산학과 정길생, 대구대학 화공과 김종화, 청구대학 장윤익 등이 재학하다 학보와 교보의 군번으로 입대했기 때문에 서로가 마음이 통했다.
비무장지대에서 군대생활과 제대할 무렵 소대에 내려가 근무하면서 나는 많은 경험을 쌓았다. 나는 그때의 느낌을 제대 후 청구대학 신문 <청구춘추>에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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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전쟁이 멀어져갔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 무장지대 혹은 비무장지대 도로변과 산협 능선의 요소요소에는 ‘Mines Danger’라는 안전 표지판이 붙어 있다. 나의 목숨이 바로 위험직전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생명의 존엄성을 알게 하려는 것이리라.
마지막 전투로 무척 요란했던 전장에서 위세를 부리던 탱크와 포탄들이 지금은 인간들의 살상을 후회하고 있는 듯 녹슬어 있다.
우거진 잡목들만이 전사자의 명복을 빌고 있는 밤이면 군사분계선 북쪽 인민군 초소로부터 울려 퍼지는 대남방송이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나의 안전을 주의하는 ‘마인스 댄저’의 표지판이 있는데도 군대에는 항상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육군 5306부대장 외 두 명의 순찰중인 장교들이 지뢰폭발 사고로 순직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같은 부대에 근무하고 있으면서도 사고방지를 위하여 항시 특별지시를 내리던 부대장의 엄격한 모습을 떠올렸다.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유한적인 것이 인간존재이며,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다.
부드러운 봄바람이 임진강 쪽에서 불어오고, 새소리가 평화스럽게 들리는 아름다운 고지 7GP에 근무하면서 인민군의 선전방송을 날마다 들어야 하는 것은 나와 나의 가족들이 안전을 위한 일이다. 나는 군대생활을 통하여 줄곧 철조망에 붙여놓은 ‘Mines Danger’의 뜻을 생각하면서, 무엇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살아야 한다는 소중함을 깨닫기 시작했다.
조용한 새벽을 타고 맞은 편의 인민군 초소로부터 대남방송이 시작되었다. 날마다 격시간으로 보내는 틀에 박힌 선전방송 내용이지만 이 날은 내가 아직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다른 나라의 언어가 흘러나왔기 때문에 귀의 신경이 예민해졌다.
인도네시아 사절단이 북한 군중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하여 인민대회에서 연설했던 것을 녹음하여 방송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독일어처럼 매우 박력 있는 언어였다. 내용인즉, 미군들은 하루빨리 남한에서 철수하라는 것이었다. 다음에는 일본 사회당 당수의 격려연설이 있었다. 주의냐 인간이냐의 선택의 분기점에서 태어난 우리 세대가 원망스럽기조차 했다.
우리 벙커 옆쪽의 6GP에서 나오는 대북방송 <푸른 꿈이여 돌아오라>의 멜로디가 공간을 퍼져간다. 잠들 수 없는 고지에서 전우들이 함께 근무하고 있어도 혼자라는 고독과 소외감이 머리를 쳐든다.
아침 해가 고개를 내밀었다 새소리가 즐거운 아침을 인사한다.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규가 그의 소설 <제2의 찬스>에서 “지구의 종말이 와도 오늘은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말이 생각난다. 아침식사가 끝나면 인민군의 이동과 집단농장의 움직임을 관측하여 중대본부에 보고해야 한다. 오늘은 비무장지대의 너머에 또 무슨 변화가 있을지 모르겠다.
- ‘마인스 댄저(Mines Danger), ‘청구춘추’, 1963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