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여선생 (15회)
  제3장 교편생활과 문단

어느 날 직원 조회시간에 교장 선생이 “앞으로 남선생은 여선생의 교실에 들어가지 말고, 여 선생은 남 선생의 교실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무슨 뜻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했다.

그날 오후 나의 2년 선배인 남문렬 선생이 나를 조용히 불러 농담 삼아 “키스는 왜 했어요?” 하고 말했다. 내가 무슨 뜻이냐고 했더니, 학부형회의에서 “장 선생과 P여선생이 연애를 하고 있고, 교실에서 키스까지 한다”는 말이 나왔다고 하는데, 어찌된 것이냐고 물어왔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전혀 허무맹랑한 말”:이라고 대답했지만, 우리 모르는 사이에 근거 없는 소문이 이미 널리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당혹해서 교장선생에게 전근을 부탁하고, 바로 이웃 청천초등학교 변차암 교장 선생을 찾아가 경위를 말씀드리고 청천초등학교에 오겠다고 부탁드렸다. 변차암 교장 선생님은 친구 변종화의 부친이었다.

그러던 중 여름방학이 되고, 방학이 끝나갈 무렵 나와 남산초등학교 서영성 선생이 맞바꾸어졌다. 숙천초등학교를 떠나면서 나는 P여선생을 만나 우리들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이 퍼져있으니 이후 만나지 말자는 말을 했다.

나는 남성초등학교에 부임해서 서영성 선생이 담임한 6학년을 맡아서 학생들을 졸업시켰다. 남성초등학교는 경산과 자인 사이에 있는 학교로 대구에서 통근이 가능한 곳이었다. 여기서도 저녁에는 학생, 낮에는 교사의 생활을 계속했다.

이러한 이중생활을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곡예사와 같은 생활이었다. 교장과 교감선생의 눈밖에 벗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자질구레한 집무는 몰라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는 최선을 다했다. 그 무렵 나는 교원노조에 가입하여 그 학교의 지부장이 되었다.

두 주일 후 두툼한 편지 한통을 받았다. P여선생이 보낸 편지였는데, 화제가 긴 매우 잘 쓴 편지였다. 그리고 말미에 꼭 한번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다기에 만났다.

다시 만났을 때의 그 여선생은 좀 흥분해 있는 것 같았다. “왜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하느냐”고 나를 다그쳤다. "P선생은 애인이 있는 사람으로 나와 입장이 다르지 않느냐“고 나는 말하면서 “어떻게 한 사람을 사귀면서 다른 사람을 또 사귀느냐?”고 하였더니, 그 여 선생은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좋은 사람이 있으면 얼마든지 사귈 수 있지 않느나“고 하면서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말했다.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서 헤어졌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 생각이 너무 고루하고 고지식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금의 여성관이라면 다른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5.16군사쿠데타는 남성초등학교에서 맞았다. 학교에까지 와서 군인이 사찰하는 일이 있었고, 그때까지 군에 입대하지 않은 교사들은 전원 학교에 나오지 못하도록 했다.

나는 야간부 학생신분이어서 졸업할 때까지 법적으로 연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무(兵務)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 며칠 간 집에 쉬고 있으니까 학교에서 다시 출근하라는 전갈이 왔다. ‘소집영장이 나올 때까지 근무하라’는 조치가 있었다고 교감선생이 말했다.
 
▲ 28사단 수색중대 복무시절 (휴식을 취하며)

그럭저럭 한 학기를 마치고 방학이 되자, 8월 8일 수용연대를 거쳐 ‘0035679’의 군번을 받고 논산훈련소 28연대에 입대했다. 일 년 간의 군복무를 마친 후 8월 10일 자로 제대하여 1962년 10월 중순 대구 신암초등학교에 복직이 되었다. 나는 대구 시내에 제대 복직하는 것이 원칙상 불가능할 줄 알았지만 김영기 교장선생을 찾아갔다.

그때는 아직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나라를 다스리는 군사정권 시대였다. 그리고 문교부장관도 도지사도 현역군인이었으며, 당시 경상북도 도지사는 박경원 육군 소장이었다. 김영기 선생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이라는 것은 온 천하가 다 알고 있었고, 선생님의 영향력도 대단하다는 것은 알만 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나는 교장선생님께 “대학에서 올바른 학문을 하려면, 대구 시내의 학교에 있어야 하는데, 앞으로 훌륭한 학문을 해서 국가와 우리 교육계에 봉사하겠습니다” 하고 간절히 부탁드렸다. 김영기 선생님은 “어디 그것이 잘 되겠느냐”고 하시면서 도지사에게 말해보겠다고 말씀하시고 기다려 보라고 말씀하셨다.

기다리는 가운데 신암초등학교에 발령이 났다. 이것은 김영기 선생님의 말씀을 도지사가 명념하신 결과로 추측된다.

대구 신암초등학교는 106개 학반으로 교사의 수가 115명이 넘는 대구에서 제일 큰 신흥학교였다. 나는 첫해에는 2학년, 다음 해에는 5학년, 그 다음 해에는 4학년을 연속해서 담임했다.

이 학교에 와서 나는 운동을 많이 했다. 해마다 한 번씩 하는 대구 시내 학교 대항 교직원 배구대회의 준비로 방과 후 20여 일 간 연습을 했다. 나는 계속 전위 센터의 자리를 맡았으며 때로는 라이트 킬 포지션의 선수로 대회에 나갔다.

내가 재직할 동안 신암초등학교가 두 번이나 배구대회에서 우승을 하여 경상북도 교직원 배구시합에 나갔다. 그리고 대구 시내 교직원 체육대회 100m 단거리에 신암초등학교 대표선수로 나가 준결승에까지 오르기도 했다. 그때의 나의 기록은 12초 5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이 학교는 야구팀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국 초등학교 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여러 차례나 한 학교였다. 처음에는 김구석 선생이 감독으로 팀을 지도하다가 나동진 선생으로 교체되었다. 두 분 다 야구에 관심이 많은 선생들이었다.

그러던 중 교직원끼리 팀을 나누어 야구시합을 가졌다. 나는 한 팀의 포수를 보았다. 초등학교 때 포수를 보았기 때문에 그 자리를 맡았더니 그 이듬 해 나동진 선생이 나에게 야구감독을 맡아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완강히 거절했다.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관계로 도저히 야구팀을 맡을 수 없다고 정색을 하며 사정을 호소했다. 겨우 모면하기는 했지만 나동진 선생과 교장선생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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