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과 무술, 음악 등 각종 취미활동 (8회)
  제2장 아름다운 삶을 누리자

나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운동에 관심을 가졌지만, 본격적으로 철봉과 평행봉, 곤봉, 아령, 손잡고 회전하기 등의 기계체조와 농구, 배구 등의 구기운동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1학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박인보가 대구에 놀러 와서 우연히 우리집 근처에 있는 <권법수련 대구도장>이라는 태권도 도장을 함께 방문했다. 그때 박인보는 이미 태권도 도장에 7개월 다니면서 평안 3단의 형(型)을 익히고 있었다. 그 도장의 최고 형(型)은 평안 3단이었다.

그 당시 대구의 태권도 도장은 <청도관>, <무덕관>, <권법수련 대구도장> 등 3개가 고작이었으면 권법수련 대구도장은 얼마 후 <창무관>으로 개명되었다.

두 달 후 나는 권법수련 대구도장의 관원으로 들어갔다. 관장은 이동주 씨였는데, 일제강점기에 대구상고를 졸업한 무도정신이 투철한 분이었다. 나보다 형이 앞선 관원은 20여명 정도가 있었고, 같은 형을 한 관원은 권굉보, 구목희, 천삼수, 박세준, 권징, 김판기 등이었다.

권굉보는 나중 영남대학교 의과대학장과 의료원장, 부총장을 지낸 유단자이고, 구목희는 외국에서 태권도장 관장을 하고 있으며, 천삼수는 대구에서 태권도장과 합기도 도장의 관장이 되었다. 그리고 김판기는 아시아게임 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유능한 무도인으로 활동했다.

나는 졸업할 때까지 2년간 도장을 다니면서 무술을 익혔다. 평안형을 거쳐, 바사이, 철기1단, 2단, 3단 등을 익혀 초단을 받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계속 도장에 다니면서 십수, 진또 등의 형을 익혀 2단과 3단을 받았다. 3단이 된 것을 나의 실력보다 경력을 감안한 것처럼 보였다.

고3 시절의 여름방학 때 옥산서원(玉山書院)에서 박인보와 함께 20여 일 간을 태권도 수련을 한 적이 있다. 박인보는 그때 이미 경주, 포항, 울산지역에서 주먹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박인보와 함께 다니면서 싸움에 대한 자신이 붙으면서 생활이 좀 거칠어졌다. 주먹패들과 싸움을 하는 횟수가 잦아졌다고나 할까.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서로 보는데서 싸움이 시작되고, 때로는 선수(先手)를 맞아 양쪽 뺨을 맞아 음식을 씹기 어려운 때도 여러 번 있었다.

그 무렵 어머니는 안심을 하지 못하고 늘 불안해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죄송스런 일이다. 그러나 태권도의 수련이나 나의 마음 자세를 강하게 가지게 한 것은 틀림이 없다.
 
▲ 30년대의 대구사범 (출처 ; 경북대학교)

입학할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의 교장은 김영기(金永驥)선생이었다. 일제강점 시절 대구사범학교 교사와 개성 송도중학교 교사를 역임한 민족의식이 뚜렷한 선생님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이시고, 4.19학생 혁명의 도화선이 된 대구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의 2.28학생 시위를 그 학교 교장으로 계시면서 지지하는 의사를 밝힌 꼿꼿한 선비정신을 가진 분이셨다.

선생님은 때때로 아침 조회와 훈화시간에 이승만 독재정권에 멍들어가는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시기도 했다. 전교생들은 교장선생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랐다.

나도 교장선생님을 충심으로 존경했으며, 교장 선생님도 나를 무척 아끼고 사랑해주셨다. 큰형님과 작은 누나가 개성 송도중학교와 포항여중에서 선생님 밑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우리 삼남매는 각기 다른 학교에서 선생님의 제자가 된 것이다. 선생님은 이 인연을 무척 소중히 여기셨다.

한번은 대구사범학교의 총동창회 축사에서 “저기 있는 장윤익은 형과 누나가 학교는 다르지만 형제가 모두 내 제자야”라고 말씀하시면서 매우 기뻐하신 적이 있다. 이러한 인간관계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선생님의 은혜를 입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러한 인연으로 나는 김영기 선생님을 영원한 나의 선생님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대구사범학교의 교훈은 ‘아름다운 삶을 누리자’였다.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기본을 알고 부드럽게 살아가도록 하는 가장 적절한 교훈이라는 생각이 그때부터 들었다.

나는 이제까지 나의 인생과정에서 이 교훈에 맞추어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김영기 선생님의 감화에서 온 것이라고 확신한다.

대구사범학교의 음악시간은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다. 한창희 음악 선생님의 지도력이 탁월했기 때문에 음악에 대한 소양이 늘게 되었고, 이것은 나중 피아노 연주를 위한 바이엘, 체르니 교본의 연습과 ‘녹향(綠香)’과 ‘하이마트’ 음악감상실을 출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학교에 입학하면서 문예반에 들어갔다. 문예반 반장은 3학년생인 박문기였고, 부반장은 2학년생인 박곤길이었다. 그동안 시 창작은 좀 했지만 나의 실력은 형편이 없었다. 2학기에 들어서면서 경북예술제가 개최되어 남여 중, 고등학생 시 백일장이 하나로 열리게 되었다. 대구사범학교에서는 박문기 선배와 3학년 여 학생이 시 대표로 참가하고, 박곤길과 나는 시조로 참가했다.

그때의 시 제목은 <수목>이었다. 나는 시조에는 전혀 문외한이기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넋두리만 늘어놓고 나오면서 실소를 금하지 못했다. 대구사범에서 참가한 대표들은 하나도 입선하지 못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칡넝쿨> 문학동인회가 결성되었다. 다음 해의 시 백일장 제목은 <항아리>였다. 1등에 경북여고 배정향, 2등에는 오성고등학교 장두성이 입상했다. 나와 박곤길은 입상에 그치고 말았다.

 
  대구사범학교 진학 (7회)
  시작(詩作)과 문교부 주관 논문 입선 (9회)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