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古都)의 향기_1 (4회)
  제1장 학창시절과 칡넝쿨

해방직후의 어수선한 사회분위기는 도시보다 농촌이 더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삼촌이 좌익운동으로 여러 번 검거되었다가 풀려나고 큰형님이 경주의 판사 딸과 결혼하기로 결정되자 아버지는 경주로 이사할 것을 결심하셨다.

분단과 미 군정 하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아이들을 시골에서 기르는 것은 교육상 문제가 많다고 느끼신 아버지의 이사 결심은 우리 형제의 생각에도 매우 잘하신 일로 생각되었다. 작은 어머니 집은 포항으로 이사하였고, 큰 누나와 작은 어머니는 작은 어머니 집에 거주하면서 포항여중을 졸업하고 각각 대구의 신명여고와 경주여고에 진학했다.

초등학교 2학년생인 나와 동생은 그해(1947.) 11월 황남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이때부터 동생과 나는 같은 반에는 있지는 않았지만 이 학교에서도 우리들은 쌍둥이로 통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은 지금도 죽마고우의 정을 교류하고 있다. 김하준, 박인보, 석우일, 이종석, 한점수 등은 이때부터 우등생들이고, 나도 늘 우등상을 받았다. 한점수가 늘 1등을 하였고, 2등을 두세 사람이 다투었다. 나도 그 중에 속한 한 사람이었다.

3학년 때의 담임은 장환준 선생님이었다. 축구를 잘 하시고, 자상하게 잘 가르쳐 주시는 인정이 많은 선생님이었지만, 체벌을 많이 하는 선생님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학교에 등교하면 혹시 맞지 않을까 학생들은 전전긍긍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더 잘하지 못했다고 체벌하고, 못하는 학생들은 못한다고 다그쳤다.

선생님은 여러 학생들에게 별명을 붙여, 학생들을 이름보다 별명으로 불렀다. 60대 후반이 된 지금도 친구들 사이에 그때의 별명을 불러서 폭소를 자아낼 때가 있다.

‘덜렁바우, 팥대가리, 말코, 주게, 넙디기, 키다리, 우이찌, 치바이, 똥개, 광대’ 등의 별명이 생각난다. 특히 여학생들에게 붙인 ‘광대’라는 별명은 그 여학생이 성인이 되어 항의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장환준 선생님에게 많이 매를 맞았으면서도 존경하는 선생님으로 추억하고 있다. 25년 후 나와 한정수가 대구 대륜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할 때 선생님 댁을 방문해서 선물을 전달하고, 음식점에서 저녁을 대접한 것이 선생님과의 마지막 해후였다.

4학년 때에 정증과 뱍종준이 내남과 박달초등학교에서 전학 왔다. 정증의 집이 사정동 우리 집 근처에 있어서 서천(西川)에 함께 수영하러 다녔고, 박종준은 번개씨름을 잘했다. 그때의 담임은 최해종 선생님이었다.
 
▲ 2019년 2월, 80년 역사를 간직한 황남초등학교를 찾은 필자 / 2019년 2월 졸업을 끝으로 황남초등학교는 3월 2일 황남동에서 용강동으로 이전했다. [출처 ; 경북연합일보]

2학년 말(1948. 3.) 쯤 큰형님이 결혼하셨다. 신부인 형수(李起壽)는 당시 경주지원장이었던 판사의 딸로 경북여고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이 결혼으로 조카 지훈이와 세 명의 생질이 태어났다. 형님은 내가 4학년 무렵 기계중학교 교사로 취업했으나, 다음해 6.25전쟁이 일어나자 육군 9사단 문관과 부산 헌병 70중대 문관으로 근무했다. 그 후 경주 문화중학교 지리 교사를 역임하고, 부산 중앙무진회사 사원을 거쳐 대한불교 조계종 교무과장, 총무과장의 직위를 거친 후 정년으로 퇴임했다.

이데올로기의 사상적 대립으로 일어난 6.25 전쟁은 동족상잔이라는 처참한 민족의 비극으로 전개되었다. UN군까지 개입한 이 전쟁은 어른들의 비극만이 아니고, 어린이들에게도 엄청난 시련과 고난을 안겨주었다. 전쟁 중에 죽어간 어린이들과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수많은 어린이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당시 초등학교 5학년생이던 우리들에게도 큰 시련과 고난을 가져왔다.      

석 달 이상 집을 비우고 피난했던 쓰라림도 결코 일어버릴 수 없는 슬픔들이었으나,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은 우리들이 공부하던 학교가 ‘제18 육군병원’으로 징발되어 교실이 없어진 사실이었다.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성건동 동사무소 마루에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때 담임선생님의 자택이 성건동 동사무소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학생들은 대다수가 황남동, 사정동, 남간, 탑리, 인왕리, 포석 등 남쪽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도, 북서쪽 끝인 성건동까지 먼 거리를 다니도록 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납득이 잘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을 최고로 생각하는 그때의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모든 것을 전쟁의 탓으로 여기고 묵묵히 받아들였다.

우리들은 성건동 동사무소, 교촌(郊村) 최 씨의 문간 마루, 향교를 전전하면서 2년 가까운 기간을 이시 교사에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학교를 다니는 요즘의 초등학생들은 우리들이 겪었던 시련과 고통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했다. 때때로 선생님은 한점수, 장윤익, 이종석, 박인보, 석우일 등을 불러서 너희들이 의논해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수업하라고 맡겨두고 자리를 비우기도 했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일어난 당시의 여러 가지 풍경들은 전쟁이 남기고 후ㅇ유증이지만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우리 학급은 한점수와 나, 김하준, 박인보, 이종석, 석우일 등의 우등권학생들이 친한 친구로 어울렸으며, 그 무렵 전학해온 주문배, 김정준, 이상백 등도 가까운 친구로 합세했다. 우리 집은 친구들의 아지트가 되어, 학교 공부가 끝나면 조무래기 친구들이 들꿇었고, 어머니와 누나들도 친구들이 오는 것을 매우 환영했다.
 
6한학년 때의 담임 최해철 선생님은 학생들을 매우 열심히 가르쳤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 반은 교실분위기가 매우 자유스럽고 학생들 사이에 경쟁이 심해서 어찌보면 군웅이 할거하는 교실이라는 말을 붙일 수가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한 반에서 5명의 박사가 배출되었다는 것은 우리나라 초등학교 역사에 드문 일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김하준이 교육학 박사, 장윤익이 문학박사, 주문배가 의학박사, 최엽이 법학박사, 한점수가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담임 최해철 선생님은 이것을 교사 시절의 최대의 보람으로 여기고 교장이 된 이후 가는 곳곳마다 제자 자랑을 하셨다.

그리고 석우일은 석탈해왕 후손이라서 그런지 역사 공부를 매우 열심히 했다. 나중 ‘신라역사과학관’을 설립하여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석굴암의 건축과정과 석굴암의 모형을 재현해보이고 신라시대의 천문도, 왕경도 등 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유적과 유물에 대하여 과학적 근거를 마련해준 공적은 초등학교 시절에서의 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주문배는 부친이 우리학교 교장선생님으로 부임했기 때문에 같은 반에 합류하여 내 옆자리에 앉았고, 성적도 우등생에 속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강북 삼성병원 신경외과 과장과 병원장을 거친 뇌혈관과 척추치료 분야에서는 한국 최고 권위자로 알려져 있는 친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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