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어머니 (3회)
  제1장 학창시절과 칡넝쿨

나는 1938년 9월 1일(음력) 아버지 장두환(張斗煥)과 어머니 김일주(金一珠)의 6남매 중 5남으로 태어났다. 작은 누나보다 4년 늦게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부모님의 사랑은 물론, 형과 누나들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유년시절을 큰 어려움 없이 보냈다.

아버지는 늘 우리형제들에게 말씀하셨다.

“세상에 별 사람이 없다. 무슨 일이든지 주저주저 하지 말고 자신 있게 나아가라. 그리고 부딪쳐라. 이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 너희들은 ‘인동 장씨 남산파(仁同 張氏 南山派) 여헌(如軒) 선생 자손이니까 항상 탐구하는 정신으로 살아가라.” 고 교훈하셨다.

그 말씀은 내가 살아가는 인생의 과정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내가 다섯 살 때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온 집안이 슬픔에 잠긴 일이 있었다. 돌아가신지 하루가 지나자 집안은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그러한 가운데 집안 어른들은 수의를 만들고, 장지를 정하고, 음식을 만드는 등 장례준비로 부산했다.

이때 초등학교 4학년생인 큰누나는 어머니를 잃은 한없는 슬픔과 고통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어머니를 마지막 한 번 더 보려고 시신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눈을 뜨고서 물끄러미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에 놀라 밖으로 달려 나오면서 “엄마가 살아있다!”고 고함치자, 이모님과 숙모님이 조용히 들어가서 어머니의 살아계심을 확인했다.
 
슬픔에 잠겨있던 집안 분위기는 곧 울음과 기쁨의 고함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 이후 어머니는 “나는 덤으로 살고 있다.”고 항상 말씀하셨다. 만약 그때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면 나의 운명도 지금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때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면 우리 6남매를 맡아서 기를 사람이 누구라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대송면에서 가장 큰 마을인 ‘동촌’에 있었고, 아버지의 둘째 부인인 작은 어머니 집은 이웃 동네인 ‘괴동’에 있었다.

작은 어머니는 키가 훤칠하게 큰 미인이었고, 성격이 매우 날카로운 분이었다. 그것은 내가 이따금 작은 어머니 집에 심부름 갈 때 마다 받은 느낌이었다.

작은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은 4남매였다. 맏아들 준익(俊翼) 형과 딸 셋이다. 준익 형을 비롯한 이복형제들은 성인이 되어 결혼할 때까지는 큰집 작은집 서로 교류가 빈번했다. 나보다 두 살 적은 여동생 말향(末香)은 성격이 매우 활달했다. 영문학과를 나온 그녀는 나를 친오빠 이상으로 따랐다. 집안 문제를 비롯해서 예술과 인생, 심지어 사귀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까지 상의할 정도여서 이복남매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사이였다.
 
준익 형과는 육사시절, 광주 근무시절, 월남 파병시절, 소령시절, 30사단장 시절, 육군사관학교 교장시절까지 여러 차례 만나 집안일을 의논하면서 형제의 정을 교류했다. 그러나 준익 형은 결혼상대자나 결혼식에 관한 일을 아버지와 상의하지 않았고, 결혼식도 아버지 모르게 해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작은댁 형제들과는 좀 소원한 관계가 되었다.
 
   
▲ 준익 형의 국회의원 활동 모습    
군단장과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낸 준익 형은 포항 남구에서 15대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큰 형님에게 사과하여 용서를 받았고, 형님과 나는 준익 형의 국회의원 선거를 성심성의껏 도와주었다.  

‘동촌’은 산과 바다를 끼고 있는 대송면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아침이면 앞산에서 산비들기와 뻐꾸기가 울고 산꼭대기에 서 있는 큰 나무에는 항상 독수리가 살아서 마을을 지킨다고 어른들은 말씀하셨다. 남으로 가면 찬내(冷川)를 건너 오천면과 동해면으로 빠지고, 북으로 가면 형산강을 가로지른 송내 다리를 건너 포항에 이르게 된다.

나는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이 된 그 다음 해(1946.)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동생 해익(海翼)은 1년 늦게 출생했으나 나와 같은 반에 입학했다. 키도 몇 차이가 없고, 모양과 색깔이 똑같은 옷을 입고 나란히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친구들은 쌍둥이로 착각하고 놀리기도 했다. 동생은 초등학교는 물론 중학교도 같은 학년에 다녀서 내 친구의 대부분이 곧 동생 친구들이었다.

동생은 고등학교 때부터 ‘여호와의 증인’을 믿게 되어 군 입대를 거부하고, 그것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다가 1980년대 중반 아르헨티나로 이민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봉제사업을 하여 사업이 한동안 번창했으나, 아르헨티나의 국가 경제 파탄으로 재작년 미국으로 이민하여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아직도 동생을 쌍둥이로 생각하고 안부를 묻는 친구들도 더러 있다.

대송면 장흥리에 있는 대송초등학교는 동촌에서 꽤 먼 거리였다. 입학할 무렵 담임은 김정환 선생님이었는데, 1952년 헬싱키 올림픽 대회에 100m 단거리 후보 선수로 선발되셨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한 달 후쯤 같은 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던 큰형(武翼)과 김정환 선생님이 달리기 시합하는 것을 보았다.

김정환 선생님은 매우 잘 달린다고 전 학교에 소문이 나 있어서, 김 선생님이 이길 것으로 생각했으나 형에게 3~4m 떨어져서 결승지점에 도달하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놀란 것은 무익 형의 달리기 실력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형제들이 ‘개성 시이’라고 불렀던 큰형은 개성 송도고보(松都高普)를 다닐 때 전 조선체육대회(지금의 전국체전)에서 100m, 높이뛰기, 넓이뛰기에서 우승하여 체육인으로서 각광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무익 형은 해방 다음해부터 2년 동안 신경통을 앓아서 올림픽대회에 참가할 수 없게 되었고, 한국 체육계에서는 이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는 일화를 나는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해방은 우리들에게 일제식민지의 구속으로부터 풀려나게 했으나, 우리의 자생적인 힘으로 성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토 분단과 민족의 갈등을 가져오는 비극을 초래했다.

해방공간의 우리 사회는 이념의 갈등으로 수많은 사람이 좌익, 우익으로 갈라져서 밤이 되면 청년들이 목총과 몽둥이를 들고 싸웠다. 이제까지 사이가 좋던 이웃이 원수가 되어 싸우고, 테러와 검거가 매일매일 일어났다. 작은아버지(삼촌)도 좌익운동에 가담하여 몇 차례 체포되어 어려움을 겪었고, 마을 어른들 상당수가 이 운동에 가담했다는 말을 어른들로부터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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