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에 물든 바다 (2회)
  제1장 학창시절과 칡넝쿨

내가 경주대학교에 부임한 지 1년 반쯤 지난 1996년 어느 날 38년 전에 담임했던 제자가 찾아왔다. 나보다 더 나이가 들어보여서 처음에는 잘 알아보지 못했으나 이름을 듣고 보니 곧 옛날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그는 38년 전 내가 겨우 스무 살이 되어 초등학교 교사로 첫 발령을 받아 담임한 ‘이근우’라는 제자였다. 자기는 지금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초등학교 때의 고사리 마을 바로 그 집에 그대로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나보다 4살 아래인, 키가 삐쭉하게 커서 좀 어설퍼 보이는 6학년이었다.

이근우는 두 달 후 쌀 한 가마니를 가지고 와서 “제가 지은 농사 중 제일 좋은 것을 골라서 가져왔는데, 이것으로는 선생님의 은혜에 백분의 일보 못 갚아드리는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 스승에게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아는 따사로운 인정이 살아있다는 느낌에서 나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근우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평생을 땅과 더불어 산 이 땅의 진실한 농사꾼이었다. 그 후 <효도상(孝道償)>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의 인간 됨됨이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근우가 돌아가자, 나의 마음속에는 초임발령 때 근무한 박달초등학교와 내가 태어나서 유년시절을 보낸 안태(安胎) 고향 ‘대송면 동촌(大松面 東村)’의 바다가 떠올랐다.

지금은 포항종합제철의 부지가 되어, 대송면 대부분이 종합제철 건물과 부대시설이 들어서 동촌마을 전체가 없어졌다는 말을 전해 들어 고향 동촌을 다시 한 번 찾아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랜만에 그곳을 찾아갔다.

그러나 옛날의 마을과 산, 아는 사람들은 간 곳이 없고 공장건물만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가운데, 종업원들이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모습들만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갑자기 실향민이 된 것 같은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고향의 푸른바다는 여전히 나의 마음속에 살아있으면서 나를 유년시절의 아름다운 추억 속으로 빠져들어 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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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년시절을 바다냄새를 맡으면서 보냈다. 내가 태어난 영일군 대송면 동촌(迎日郡 大松面 東村) 불(해변)은 온종일 놀아도 지루하지 않은 넓고 긴 백사장이었다. 나는 바다 풍경에 안겨 생활하면서 즐거움을 찾았고 파도소리는 나를 부르는 부드럽고 달콤한 꿈의 소리로 들렸다. 내가 일곱 살 때 경험한 늦여름 바다의 인상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생생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저녁노을이 깔리고 있는 늦여름의 동촌바다는 파도가 잔잔해서 그런지 너무도 조용했다. 가늘고 고운 흰 모래밭이 길게 이어져 있는 해변에는 방게 몇 마리가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방게를 따라 재빨리 쫓아갔으나 그 놈을 잡는 것은 일곱 살 밖에 안 된 나에게 무리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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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게는 모래 밑 깊숙이 파인 구멍으로 잽싸게 도망쳐서 내가 포기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구멍에 흰모래를 넣고 한참을 기다렸다. 그러나 방게는 나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 끝내 나오지 않았다. 방게와의 인내심 싸움에서 지고 나서, 나는 얕은 바다에서 조개를 잡고 있는 이모님(김설영)과 큰 누나(장재향), 작은 누나(장수향)쪽으로 눈이 갔다.

대구에서 중학교 선생님으로 계시면서 여름이 되면 빠뜨리지 않고 우리 집을 찾는 이모님은 당시로서는 신여성에 속하는 지도급 여성에 속했다. 해마다 7월말이나 8월 초순경에 오셨으나, 그해(1943.)에는 20여일 가량 늦게 오셨다. 이틀 동안 함께 바다에 나온 큰누나와 작은 누나는 각각 초등학교 6학년생과 4학년생이고, 이날따라 작은형(재익)과 동생(해익)은 바다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누나들이 조개를 잡고 있는 바다 쪽으로 달려가서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 바다 밑에는 모래들이 숨 쉬고 있었다. 모래알들은 위로 올라갔다 밑으로 빨려들었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모래가 숨 쉬는 것이 아니라 조개들이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몇 개의 모시조개를 잡아 올리면서, 살아있는 바다의 신비로운 냄새를 맡았다.

바다 위에는 돚단배 몇 척이 노을빛을 뒤로 받으면서 호미 곶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살아 숨 쉬는 바다와 돚단배 위로 날고 있는 갈매기를 바라보면서 바다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어린아이로 자라간 것이다.

내가 항상 바다를 가까이 하고 바다에 대해서 향수를 느끼고 있는 것은 아버지가 하셨던 일과 연관이 되어 있다. 아버지는 포경선(捕鯨船) 1척, 데구리배 1척, 돚단배 2척과 어장(漁場)을 가진 선주(船主)이고, 백여 마지기의 논을 소유한 지주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포항 어업조합장과 대송초등학교 1~3대 사친회장을 지내면서 오르간과 확성기, 앰프 등을 학교에 기증하여 학교 선생님들과 마을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는 지역유지(有志)였다.

대다수의 조선 사람들이 가난에 허덕이며 하루에 한 끼도 먹기 어려운 궁핍한 시기에, 먹는데에 아무 지장이 없었던 나는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굷주리고 있는 친구들의 입장을 너무 몰랐다는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경주에 대한 생각 (1회)
  아버지와 어머니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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