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행히도 징병징집은 연령이 8개월 정도 초과되어 면제가 되었으나 징용징집 문제만은 면할 길이 없었다. 다만 징용 면제의 길이 있다면 공무원이 되든지 아니면 국가 중요 기관에 근무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재령에 있는 어느 광산 사무소에 가서 얼마동안 사무직원으로 근무를 하다가 다시 돌아와 이번에는 우체국에서 근무를 한 일이 있다.
우체국에 근무하면 징용이 면제된다고 하였는데도 징용징집 대상자 신체검사 통지서가 나와 설사약을 먹고 생병을 앓아누워 있는 등 꾀병을 부리기도 했다. 다행히 징용이 면제된다는 통지를 받고 우체국에 계속 근무를 하다가 8‧15 해방을 맞게 되었다.
좀 비겁하기는 했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해서 면제가 되었지만 당시 징용으로 끌려간 우리의 동족들의 앞길과 운명은 어떻게 되었는가. 지금 사할린이나 남해도에 남아 있는 동포의 이야기들은 남의일 같지 않은 지난 우리 세대들의 인생 항로였다고 하겠다.
8‧15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는 일제 36년간의 억압에서 풀려나 자유와 독립을 성취하는 해방의 기쁨과 민족의 승리였지만 일본은 바로 패망과 민족의 치욕을 겪어야하는 날이었다. 한나라가 전쟁에 패망하면 그 나라와 국민의 위상이 어떻게 되는지 내가 보고 느낀 것을 회상해 본다.
일본이 한일합병이니 청일전쟁이니 지나 사변이니 또 노일전쟁까지 해서 파죽지세로 한국과 중국의 일부 만주 등을 지배하면서 그 세도가 얼마나 도도하였는가. 그뿐인가 정부 관료는 말할 것도 없고 말단 관공서의 모든 요직까지도 일본인 일색이었다.
그리고 통치방법의 하나로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우리 민족에게 동궁요배(동쪽에 있는 일본 궁성에 아침마다 경배를 하게 함)를 강요했고, 일본어 교육과 한국어 말살 교육정책을 실시했으며, 심지어는 성씨를 일본식으로 개명하도록 하는 등 완전히 인간 개조 정책을 하여 한국민의 정서 말살을 꾀하는 등 그야말로 목불견의 고자세를 부리던 그들이었다.
당시 우리 강 씨의 일본식 성은 강 씨의 본관이 신천(信川)이기 때문에 그 본관의 신(信)자를 따고 강(康)자를 합해서 신강(信康, のぶやす) 즉 일본발음으로 (노부야스)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지금 와서 생각하면 다소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하겠지만 당시는 특별한 민족주의자가 아니고서는 대다수 국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태평양전쟁에서 무조건 항복이라는 말 한마디에 모든 일인(日人)들은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고 애원을 하며 그 많은 재산과 가재도구를 내버려둔 채 도망치는 모습은 참으로 눈뜨고는 못 볼 지경이었다. 그리고 만주 각지와 조선 각지 곳곳에서 기세가 당당하던 수많은 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초라한 행색이 되어 기차나 자동차 또는 배 등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타고 일본 땅을 향해 도망치던 그 모습은 처참하다 못해 비통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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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황의 항복방송을 들으며 무릅꿇고 눈물을 흘리는 일본인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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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해방을 맞은 우리 민족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집밖으로 뛰쳐나가 우렁차게 외치는 만세소리가 온 천지를 진동시키는 그 위력에는 더욱 겁에 질려 한마디 말도 못하던 그들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하다.
뿐만 아니라 일인들이 혼비백산하여 물러가고 치안 상태가 소홀해지자 만세를 외치던 군중들은 그동안의 울분이 폭발하여 그들이 사용하던 가옥에 침입하여 문짝이며 가구며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때려 부쉈고 심지어는 화장실 변기까지도 빼 가는 분풀이를 하던 그 모습은 지나친 행동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기쁨과 환희도 잠깐, 곧이어 소련 공산군이 침입을 하게 되어 또다시 북녘 땅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덮기 시작했다.
부친께서는 참으로 사업 수완이 비상하셨다. 희천 신풍에서 그 많은 재산을 다 털어 버리시고 만주로 가셨다가 이곳 신천으로 오셔서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또 다시 시작한 상업이 불같이 일어나 약 10년 동안에 희천 신풍에서 보다도 더 많은 재산을 모으셨다.
상업의 업종은 국내산 직물류 즉 견직물, 무명, 모시, 삼배 그리고 누비 요류 까지였다. 그동안 모은 재산으로는 전답을 하나둘 씩 사 모아 온 것이 여러 필지가 되었다. 내가 자세한 것은 잘 모르지만 이곳 저곳에 있는 전답은 모두 소작인들에게 맡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김일성 공산정권이 토지개혁을 한다고 모든 토지를 몰수하여 경작자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고, 지주들은 도리어 소위 부르주아 계급이고 농민의 피땀을 빨아먹었다는 이유로 먼 타지방으로 강제 이주를 시키는 등 그 무시무시한 공산정치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요즘 우리가 TV 드라마에서 보듯 소련 스탈린 공산 정권이 우리 민족인 고려족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과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그뿐인가 화폐개혁이라고 해서 당시 통용되던 모든 화폐를 몰수하여 무효화하고 어느 누구에게나 신 지폐 500원씩을 균일하게 나누어주어 빈부의 차이를 없애 버리려는 정책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인간은 날 때부터 빈부를 타고 나는지 그렇게 똑같이 동등하게 분배를 했는데도 세월이 흐르면서 돈은 그전과 같이 가졌던 자에게로 다시 모여지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돈은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 자에게 돌아간다는 평범한 진리를 알게 해 주었다.
그리고 공산당은 가장 낮고 천하게 일하던 노동자나 하인 등의 인물들을 고관대직에 등용시켜 소위 계급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고 종교탄압도 차츰 도수를 높여 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