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도중 밤이 되어 자게 되었는데 잠자리 또한 가관이었다. 그 많은 인파가 어디서 편히 잘 곳이 있겠는가. 혹시 있다 하더라도 앞서 가는 사람들이 차지하고 뒤에 가는 사람들은 잘 곳이 막연하였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운 좋게 어떤 집 부엌에 빈자리가 조금 있어서 이리 저리 끼워 앉아 눈을 붙였다.
다음날 우리는 다행히도 쌀과 취사도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침끼니를 그런대로 때울 수가 있었다. 그렇게 하면서 우선 일차 목적지 해주까지는 도착하였다. 그리고는 먼저 떠난 아내와 아이들 셋이 걱정이 되어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다행히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아내는 어머니 말을 무조건 순종하는 형이어서 출발 당시 다른 사람들이 모두 떠나기는 하고 나는 재령으로 가서 돌아오는 길이 늦어지고 있는 형편에 마침 어느 분이 마차에 짐을 실어 주겠다는 것이고 또 어머니의 빨리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떠나라는 독촉 때문에 그만 급한 생각에서 먼저 떠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는 도중 말이 그만 힘에 겨워 길에 주저앉아 가지를 못하게 되자 그 말 주인은 아내의 보따리를 길가 아무 곳에나 내려놓고 가 버렸다는 것이다.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하겠지만 그 상황에서는 서로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이기 때문에 어떠한 방법이 없었다는 아내의 말이었다.
아내는 보따리를 이고 갈 형편도 못 되고 가는 사람마다 사정을 해도 안 된다고 해서 그저 긴 한숨만 쉬며 한없이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같은 종씨 강창숙 씨 가족이 소 달구지에 피난 짐을 가득 싣고 가고 있어서 체면 불구하고 자초지종을 말하자 그 보따리를 천만 다행하게도 실어 주어 해주까지 왔다는 것이다.
그때 그 상황에서는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도 없고 옳고 그른 판단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형편을 고려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이해할만한 일이었다.
방송과 지도층의 말인즉 피난민은 모두 속히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성급하게 행동할 수도 없어서 주저하고 있는데 어머님과 동행하던 고모님은 먼저 집으로 들어가신다고 하여 부득이 먼저 신천으로 들어가시고 나와 그 외 가족들은 남아서 좀 더 기다리며 상황을 보아 행동하기로 하였다.
잠시 동안만 머물러 있으면 되리라는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우선 방에 때야 할 나무가 필요했다. 그래 소와 달구지를 끌고 가까운 산으로 가서 약간의 나무를 해 가지고 오는 도중이었다.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천만 뜻밖에도 나의 사촌동생 강상원(康祥元)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모두가 그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인도하시고 섭리하시고 계시는 것만 같았다.
동생은 고향인 평안북도 박천에서부터 유호운이라는 친지와 같이 내가 있던 신천을 향해 그 머나먼 피난길을 왔는데 내가 벌써 떠나고 없으니 할 수 없이 뒤쫓아 무조건 정처 없이 오던 길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길 노상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그 만남이 그저 우연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서울에 와 있을 때 우리 집에 가끔 나오면 내 대신 모든 일을 돌보아 주었고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에도 여러 가지로 돌보아 주어서 고맙기도 한 동생을 이렇게 피난길거리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 시간 이후부터는 같이 온 유호운 씨와도 같이 한식구가 되었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우리 내외와 아이들 셋, 동생과 동생 친구, 그리고 피난길에서 만난 고모의 딸 해원이와 그의 딸 금옥이 또 소 임자의 가족 3명, 모두 12명이 한 식구가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 속담에 사람 입에 거미줄 안 친다고 했듯이 그 많은 식고가 하루도 끼니걱정을 해 본 일은 없었다. 그렇게 하는 것을 10여일이 지나도록 그곳 해주에 계속 머물러 있다가 하는 수없이 신천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그곳에서 약 100리 정도 거리에 있는 이목이라는 곳까지 갔으나 내가 그만 이질 배앓이에 걸려서 더 이상 갈 수가 없어 그 이목에 머물러 있으면서 한 3일간 병치료를 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구월산에 피신해 있던 인민군 부대가 다시 반격을 해와 신천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이질 배앓이로 신천에 못 들어간 것이 천만다행이었지만 이미 들어가 계시는 어머니는 다시 빠져 나올 수가 없게 되었고 모처럼 만났던 어머니와 또 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목에서 어떤 사람이 주는 다이아찡(당시는 만병통치약으로 속칭하던 약임) 몇 알을 먹고 이질 배앓이가 치료되어 다시 피난길을 떠났다. 우리 일행이 도착한 곳은 태탄이라는 곳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다. 그러나 평화로운 크리스마스가 아니고 고생길 피난길에서의 크리스마스였다.
아침에 일어나 짐 보따리가 이상한 것 같아서 조사해 보니 내 즈봉(바지) 하나가 없어진 것이었다. 그 즈봉은 미군 군복을 검정색으로 염색한 것이었는데 당시 우리 사회 형편으로 보아 꽤 좋은 것으로 손꼽던 것이었다. 하여간 나에게는 소중한 물건이 없어졌으니 한참 소동이 벌어졌다. 전말인즉 같이 동행하던 소 임자의 자부되는 젊은 부인이 그만 욕심이 났던지 밤중에 슬쩍했던 것이다.
즈봉은 다시 돌려받았고 나는 마음이 다 풀어졌는데도 그 부인과 가족은 부끄럽고 미안해서 우리와 같이 더 이상 피난길을 동행할 수가 없다고 하며 집으로 돌아가서 농사나 짓겠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도 더 이상 만류할 수가 없어서 서로 헤어지기로 했다. 그러나 우리는 소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는 실정이어서 소는 우리가 계속 데리고 가기로 하고 그 대신 신천 우리 집에 가면 소 값 정도 이상의 재산을 어머니와 의논하여 가져가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그 후 우리 가족은 창린도 섬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여기서부터는 본격적인 피난 생활이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