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인민군 탱크 위에는 머리를 박박 깎은 푸른 색 죄수복을 입은 죄수들이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다음 오는 인민군 탱크 위에는 빨간 티셔츠를 입고 붉은 깃발을 휘두르는 고등학생들이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다음 세 번째 탱크 위에는 일반 시민들이 만세를 부르며 타고 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아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한숨만 쉴 뿐이었다. 더욱 비통한 것은 내가 가르치던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저럴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과 지금까지 그 어려운 고비를 넘기며 학업을 마치고 이제부터는 조금은 재미있는 세상을 살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것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가 막연한 생각을 하며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같이 있던 박 선생과 의논을 해 보았다. 그런데 그의 생각은 나보다도 더 조급하였다. 그는 월남하여 한동안 서북청년회에 가입해서 반공 활동을 한 일이 있어 곧 당장이라도 도강(渡江)을 해서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조금은 달랐다. 나는 월남해서 고작 음악공부를 한 것 밖에 없으니 그들 공산당에게 잡힌들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는 무모한 아전인수격인 생각과 한편 일구월심 북에 두고 온 가족생각만 하던 것이 어찌하면 다시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 희망을 가져 보기도 해 보았다.
그리하는 가운데 일부 정보가 빠른 시민들은 지난밤에 벌써 당시 하나밖에 없던 지금의 제일한강교를 통해 피난을 했는가 하면 아군은 군 작전상 그 한강교를 지난밤 폭파해 끊어버리고 인민군의 남하를 차단하였던 것이다. 그런 연유도 모르는 정보가 조금 늦은 시민들은 자동차를 타고 끊어진 다리인줄도 모르고 도강을 하다가 그만 한강으로 추락해 사망하는 자의 수가 속출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아군은 3일 동안이나 인민군의 도강을 저지하기 위해 한강을 사이에 두고 격전을 주야로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격하는 총소리가 총소리라고 하기 보다는 마치 팥죽 끓는 소리와도 같이 들릴 정도로 총격전은 치열하였다. 이러한 소리를 들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마포 강 쪽으로 나룻배를 타고 많은 사람들의 도강은 계속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박 선생은 자기는 도강하기로 결심을 했다고 하며 나의 의사를 묻는 것이었다. 조금 더 기다려 보겠다는 나의 답변에 드디어 박 선생은 마포나루터로 나가 무조건 배를 타고 건너가는 것이었다.
나는 점점 멀어져 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하숙집에 돌아온 나는 2-3일을 더 머물며 견디어 보았으나 매일같이 치솟는 쌀값으로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다. 하숙집을 나온 나는 신천에서 월남해 온 이광옥 씨 집을 찾아가 보았다. 그곳에도 역시 장기간 머무를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아군은 3일 동안 한강 방어작전도 포기하고 남으로 남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에 남아 있으려고 하여도 우선 급한 것이 쌀 문제였다. 매일같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쌀값은 대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인민군들이 여기저기서 미처 피난 가지 못한 요인들을 색출하는 체포작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내가 나가던 학교들을 들러보았다. 음악전문학교는 개강을 염두도 못하고 있고 고계중∙고등학교에는 북에서 온 공산당원들이 그곳까지 벌써 손을 뻗치고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공산당의 노래를 가르치라는 것이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서 월남했는데 그들의 노래를 가르칠 수는 없었다. 2-3일 눈치를 보다가 결국 나는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을 하였다. 이렇게 하면서 나는 서울에서 약 10일간을 보냈던 것이다.
피난길은 당연히 남쪽으로 가야 했는데 전선이 매일 매일 남하하고 있어서 자칫 잘못하다가는 인민군 뒤를 쫓아가는 꼴이 되어 붓들이면 더 위험하기 때문에 반대방향으로 가기로 하고 막연하나마 북쪽 방면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그때 물론 나에게는 가진 재물이나 소지품 같은 것은 별로 없기도 했지만 그저 무전여행이라도 떠난다는 심정이었다. 옷은 그때가 여름이어서 윗도리는 흰 와이셔츠 단벌 차림에다 소지품이라고는 회중시계 단 하나 뿐이었고 수중에는 비상금조차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신발만은 미군 군화 튼튼한 것 하나를 신고 있었다.
그러한 위기상황 속에서 이것저것 생각과 계획을 세울 수도 없는 아주 급박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설마 사람이 굶어죽기야 하겠나 하는 담담한 심정이었다.
발길 가는 대로 걷기 시작하였는데 가다보니 수색방면 어느 농촌이었다. 점심때가 되어 배가 출출하여 혹시나 하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에는 논에 김을 매는 사람들에게 점심을 주기 위해 한 아낙네가 점심밥 바구니를 이고 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넉살 좋게 그곳으로 가 피난 가는 나그네라고 하고 점심을 좀 얻어먹으러 왔다고 하였다. 우리 농촌 인심이야 어디 가든지 후한 것이어서 선뜻 한자리에 앉으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우선 출출한 김에 요기를 하고 오라는 곳은 없어도 어디론가로 떠나야 하는 나그네 신세가 된 나는 또 정처 없는 길을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