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때가 되어서 잘 곳을 구하기 위해 이번에는 어느 마을에 있는 집으로 찾아 들어갔다. 나의 사정을 말하고 하루 밤 신세질 것을 청하였다. 그곳에서도 역시 친절하게 응해주었다.
그때가 여름이어서 방안보다는 마루가 더 편할 것 같아 마루에서 자기로 하고 자리에 누워 잠을 자려니까 이상하게도 몸이 자꾸 가려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날이 새어서 그 이유를 알았지만 그 마루 밑에 개 한 마리가 자고 있었기 때문에 개벼룩이 나를 괴롭혔던 것이다. 밤중에 고이 잠들어 있는 주인을 불러 하소연할 수도 없고 밤새도록 잠을 못 이루며 애태우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 하루하루 가는 것이 연안 방면으로 가고 있었다. 가는 도중 우연히 전도대에서 같이 일하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그 친구는 연안이 집이었는데 6.25가 나자 어선을 타고 피난을 나갔다가 이제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라는 것이다.
그 친구는 부인과 돌이 지난 아이를 동행하고 있었는데 가엽게도 그 아기는 홍역을 앓고 있는 중이어서 얼굴에 붉은 점이 가득 나 있었고 피난 짐 보따리는 큰 것이 두 개나 있었다. 이것을 가지고 온갖 고생을 하며 가는 것을 나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날부터는 그들과 같이 동행을 하면서 그 어려움을 좀 도와주기로 하였다.
그런데 형편이 그렇다 보니 하루에 이동하는 거리가 고작해야 20-30리 정도였다. 그렇게 가는 동안 숙식문제는 내가 떠나올 때 하던 방법과 매 한가지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많은 피난민들의 피난길은 다 마찬가지였겠지만 그야말로 죽지 못해 이어지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여러 날 고생 끝에 연안에 도착하여 그 친구는 자기 집으로 가고 나는 연안 시내에서 약 30리 떨어져 있는 반제이라는 동네로 갔다. 그 친구는 먼 훗날 신학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었다.
반제이라는 곳은 토마스 전도대 시절 전도 집회를 갔었던 곳이다. 그런 관계로 구면이 되어 있는 김 장로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그곳에 온 연유를 말씀드렸더니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제는 북한군이 38선을 무너뜨리고 남한까지 내려왔으므로 나의 가족이 있는 곳 북녘 땅까지 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나의 의견을 제시해 보았다. 그런데 김 장로님과 그 외 여러분의 의견은 달랐다.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해서는 큰일 난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만일 어떤 경로로 해서 북한에까지 갔다고 가정을 했을 때 그곳의 보안대에서 낯선 사람이 왔고 더욱이 월남했던 사람이 돌아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냥 묵인하겠는가 라는 명확한 답변이었다.
나는 그 말이 옳다고 시인하고 북에 가는 것은 지금 상태에서는 포기하는 것으로 하고 다만 그곳에 당분간 머무르면서 바쁜 농사일을 좀 거들어 주기도 하며 기회를 보기로 하였다.
가을이 되어 추수계절이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이런 농촌에서 한가롭게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서 김 장로님에게 서울로 올라가야겠다는 말씀을 다렸다. 그 말에 김 장로님은 친절하게도 이별의 정표로 나에게 좁쌀 두 말을 자루에 넣어 주는 것이었다. 신세진 것만도 감사한데 귀한 좁쌀까지 주시니 더욱 감사하였다.
주신 좁쌀을 멜빵으로 등에 지고 걸어서 서울까지 올라갈 생각을 하고 집을 나섰다. 처음에는 왔던 길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나섰건만 한 20리 걸어 나오니까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고 부르터 그 먼 길을 걸어서 가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또 나에게 원시적이나마 갈 수 있는 방법을 열어 주시었다. 그곳에서 얼마쯤 가노라니까 그전 서울에서 알고 지내던 친구 한 사람이 자그마한 샛강 다리 위 길 옆에서 과일을 펴놓고 팔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반가워서 이거 이모 씨 아니요 하며 인사를 하자 그도 나를 보고 반가워하며 서로 그 동안의 문안과 안부가 오고 갔다.
그 이 모씨의 말인즉 자기도 이곳까지 피난을 왔으나 먹고 살 길이 없어서 이렇게 과일장사라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도 서울에 올라가 공부하던 책과 짐을 가져와야 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둘이 같이 서울로 가자고 내가 제의를 하였다. 그 친구는 잠시 무엇을 생각하다가 자기가 타던 자전거 하나가 있는데 튜브가 없어서 타지를 못한다는 것이었다. 튜브가 없어도 좋으니 가져오라고 하여 타이어에 가는 새끼줄을 총총 감아서 타보니까 그런대로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자전거에 내가 가져오던 좁쌀 두 말을 뒤에 싣고 둘이서 교대로 타기로 하고 떠났다. 그 좁쌀 두 말을 등에 지고 올 때보다는 한결 편하고 그냥 걸어가는 것보다도 빨리 가기도 하였다. 그렇게 가는 것이 임진강 철교까지 갔다. 그 임진강 철교는 아군의 폭격을 맞아 자동차 통행은 불가능하지만 군데군데 나무판자를 놓아 보행만은 가능하였다.
그곳에는 인민군 보초병 한 명이 지키고 있으면서 그곳을 통행하려면 통행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만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나는 또 하나의 묘안이 떠올랐다. 서울 있을 때 공산군이 들어온 후 고계중ㆍ고등학교에 며칠간 나가던 때 교사들에게 신분증을 하나씩 만들어 준 일이 있었다. 나는 공산권 지역을 피난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혹 필요할지도 몰라 소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기회에 이것이라도 이용해 보자 하고 그 신분증을 제시하고 내가 빨리 서울로 가야한다고 경비하는 인민군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랬더니 의외로 나는 순순하게 통과가 되었다. 그러나 동행하던 친구는 어떻게 피해나갈 방법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 친구가 하려던 일을 내가 대신 해주기로 하고 자전거는 나 혼자 타고 서울로 향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