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중학교 입학 (6회)
  제1장 내 고향 도라산

경복중학교 입학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할 때, 우리 반 친구들은 대부분 장단읍에 있는 장단중학교에 가든가 개성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을 했는데, 나는 서울에 있는 경복중학교(景福中學校)에 입학원서를 냈다. 첫째는 아버지가 원하셨고, 집안의 분위기도 큰형님이 경복을 나오셨으니 나도 경복을 가야 한다는 쪽이었다.

그러나 나는 너무나 자신이 없었다. 당시 경복중학교는 경기중학교(京畿中學校)와 함께 우리나라 수도 서울에 자리 잡은 최고의 명문으로 전국의 수재들이 몰려들 터인데, 장단 시골학교를 나온 내가 합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고, 그래서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주사위는 그대로 던져졌다. 나는 경복중학교에 입학 원서를 냈고 어머니가 마련해주신 미군텐트에 검은 물감을 들여 만들어서 비를 맞으면 까만 물이 흐르는 텐트천 양복을 입고 아버지 손에 이끌려 서울로 올라왔다.

함흥도청에 계실 때 큰형님을 함흥고보(咸興高普)에 입학시킨 후, 서울로 옮겨 오실 때 제이고보(第二高普) 경복에 편입시켜 결국 경복 4회 졸업생이 되게 한 일이 있는 아버지는 큰 감회에 젖어서 내 손목을 꼭 쥐시더니 종로구 제부동의 큰 형님 댁에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큰형님은 한술 더 떠서 “내가 경복을 나왔으니 너는 경기에 응시하라.”고 놀림 반으로 말씀하셨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정색을 하고 “형님이 나온 경복에 가겠습니다.” 하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시험을 보던 날 아버지와 같이 제부동에서 누하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언덕에 올라섰을 때, 아버지는 북악산(北岳山) 쪽 ‘부엉이바위’를 가리키면서, 당신이 일찍이 서울에 와서 대한제국 탁지부에 근무하실 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달라고 늘 마음속으로 빌던 바위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너도 불안할 테니 도와달라고 마음속으로 빌어 보렴.” 하시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이어 귀신이 갖다놓은 것도 아닐테고 그렇다고 조각가가 만든 바위도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멋있는 바위가 북악산 중턱에 부엉이처럼 앉아, 서울 장안을 편안하게 내려다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난 뒤 나는 거짓말 같은 일을 당하였다. 시험문제에 이 부엉이바위가 떡하니 출제되어 나온 것이다.

북악산 부엉이바위는,
① 조각가가 만든 것이다.
② 장사가 가져다 놓은 것이다.
③ 풍화작용(風化作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맞는 것에 ○표를 하라는 것이다.

물론 나는 풍화작용에 동그라미를 쳤다. 많은 학생들이 북악산 부엉이바위가 무엇이냐고 야단들이었다. 부엉이바위가 무엇인지 모르는 학생들은 대부분 조각가가 만들었다고 답을 한 모양이었다. 아버지의 그 무엇이 나에게 통한 사례였다.

시험을 보고 난 후 한결 같이 똑똑하고 멋있어 보이는 서울 아이들 속에서 주눅이 든 나는 합격하기는 틀린 것 같아서 2차로 응시하기로 하고 원서를 내기 위해 부지런히 만리재에 있는 양정중학교로 향했다. 양정중학교의 엄 교장 선생님은 마침 아버지와 아는 분이시기도 했다.

양정중학교의 첫 소집이 있는 날 오후, 경복중학교에서는 합격자 발표를 했다. 비가 내리는 속에 방(榜)이 붙었고, 내 번호 121번을 확인한 나는 너무 좋아서 그대로 아버지 품에 안기고 말았다.

해방된 지 3년 후인 1948년,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수립된 해에 나는 그렇게 경복중학교에 입학했다. 벽지나 다름없는 장단국민학교에서 경복중학교에 합격한 나는 플랭카드가 내걸릴 정도로 떠들썩한 축하를 받았다.
 
▲ 경복중학교 1학년 2반 친구들과 담임 정연무 선생님, 부담임 신용선 선생님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나다)

기차에서 바라 본 어머니의 모습

제부동에 있는 형님댁의 건넌방에서 나의 서울생활은 시작되었는데, 토요일이 되어 집에 내려가는 날은 너무나 좋아서 발걸음이 저절로 가벼워졌다.

적선동에서 전차로 서울역까지 가서 경의선을 타면 신촌, 수색, 능곡, 일산, 금촌, 문산을 지나 임진강철교인 도깨다리를 건너 장단역까지 1시간 40분이 걸렸다.

매번 토요일이면 지나가는 똑같은 기차길이지만 도랍산을 멀리 바라보면서 지금의 도라산역 자리를 지나 장단역으로 진입하는 당시의 기관차 미카3이 석포천 다리 위를 지날 때쯤이면, 우리집이 멀리 모이고 마당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때마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어, 얼굴이 붉어졌고, 정신없이 손을 흔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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