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과 초등생 시절 (5회)
  제1장 내 고향 도라산

해방, 그리고 미군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았을 때 전 국민의 대한민국 만세 소리는 하늘을 찔렀지만 그것도 잠시, 나라가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으로 갈린 것을 알고 나서는 실망 또한 형언할 수 없이 컸는데, 그러나 우리 어린 학생들에게는 이 같은 변화가 그냥 신이 나는 상황일 뿐이었다.

하루는 장단 역전에 나가봤더니 소련 전투기 야크 수십 대가 무리지어 상공을 날고, 오토바이를 탄 소련 군인들이 거리를 질주하고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빼앗은 시계 수십 개를 팔뚝에 차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사람도 보였다. 그들은 38선이 임진강 이북인 줄로 잘못 알고 개성을 지나 장단까지 온 모양이었다.

놀란 장단 시만들은 우왕좌왕,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 한다면서 야단법석이 났는데, 곧 미군들이 들이닥치자 소련 군인들은 장단읍 군내면을 지나 구화장 쪽으로 달아났고 일부는 개성 방향으로 급히 빠져나가기도 했다.

미군들은 소련군과는 달리 우리 어린 학생들에게 껌과 드롭프스라는 사탕, 초콜릿을 주면서 친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제 때 학교에서 미국과 영국 군대들은 모두 귀신같다고 배웠는데, 막상 보고나니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만 빼면 마음씨 좋은 군인 아저씨들이었던 것이다.
 
▲ 연순이 조카와 나 (8살 때)

서성우(徐成祐) 선생님

미군이 들어오고 미 군정(軍政)이 시작되면서, 우리는 학교에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교과서는 ‘가리방’이라고 하는 등사기로 밀어서 만든 것이었다. 내가 해방을 맞아 한글을 익히고 우리 역사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2학기의 어린 학년이었지만, 그때는 일본말과 일본 글을 보는 것이 우리 것보다 쉬웠던 기억이 난다.

해방이 되면서 만주나 일본에 있던 장단 사람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고 간이(簡易)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모두 장단국민학교에 편입되면서 남학생 한반, 여학생 한 반이었던 우리 학년도 남학생 두 반, 여학생 한 반 등 모두 세 반으로 늘어났다.

나는 그때 우리반 담임이시던 서성우 선생님을 잊을 수가 없다. 도라산 건너 바을인 방추골에 사시는 선생님을 나는 가끔 등하교 길에서 만나 뵙기도 했는데, 선생님은 내가 산수(算數)에 약한 것을 아시고는 내게 우리반 산수부장을 맡기시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선생님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산수부장을 맡고 나니 다음날 배울 산수 문제를 미리 익혀두지 않을 수가 없었고, 나는 그렇게 준비해간 문제들을 급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칠판에다 풀고는 했는데, 그러다보니 산수가 재미있어지고 전체 성적도 올라갔다.

국어와 읽기, 음악 역사 등은 잘했지만 유독 산수가 문제였던 나에게 산수에 재미를 붙이고 자신감을 갖게 해주셨던 서성우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나는 훗날 서울의 경복중학교에 합격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 경우 지금의 내가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아찔해진다. 

친구 김석주(金錫柱)

나는 몸집은 작았지만 그런대로 공부는 잘했었는데, 큰 도회지에서 공부하다 온 친구에게 밀려 수석(首席)을 내주고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졸업식에서 송사(送辭), 6학년 때 답사(答辭)를 했던 것을 보면 읽는 것은 그때부터 소질이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또 하나의 내 장점은 무슨 일을 하거나 꾸준한 것이었는데, 6년 개근을 할 뻔했던 것을 놓치고 정근으로 만족해야 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아쉽다. 장단군 강상면 구화리에 사시는 고모님이 회갑을 맞으셨을 때, 우리 식구 모두가 축하하러 갔다 오는 바람에 하루를 빠진 것이었는데, 그 무렵에 유행하던 말라리아에 걸렸을 때도 덜덜 떨면서 학교는 빠지지 않았던 나였기에 개근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었다.

한번은 개성에서 개최된 음악 경연대회에 참가한 일이 있었다. 일제가 끝나고 우리나라 동요를 보급하기 위해서 열렸던 대회로 개성, 개풍, 장단, 연백에서 많은 학생들이 참가했다. 나는 독창회에 참가해서 “...... 고기 고기 한 조각 얻어가지고 엄마하고 나하고 먹으렸더니 도둑 괭이한테야 그만 떼웠지” 하는 새로 나온 동요를 불렀다. 지금은 멜로디와 가사 모두 일부만 기억이 나는데, 어떻게 그런 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 무렵의 내게는 김석주(金錫柱)라는 친구가 있었다. 장단 역전에서 갑부로 이름난 집의 아들로 체구는 보통이었으나 미남형에 머리가 좋은 친구였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잘못하는 친구가 있으면 가차 없이 혼을 내주곤 하던 그가, 우리가 역전에 살다가 도랍산 고향으로 들어갈 때, 제 키와 비슷한 우리 집 괘종시계를 끙끙거리면서 들어다 주던 기억이 새롭다.

그는 우리 집에서 도까밭에 묘목을 심는 날에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가해 가장 열심히 일을 돕곤했다. 서울로 진학을 한 뒤로는 경의선 통학생들 사이에서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주먹으로도 이름을 날리더니, 세월이 흘러 사업에 성공을 했고, 지금은 노후를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나를 좋아하고 도와주던 인연은 끊임없이 이어져 얼마 전 고향 땅, 특히 도까밭을 특별조치법에 의해 되찾는 과정에서도 그는 또 한 번 자기 일을 제쳐두고 앞장을 서주었다. 두고두고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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