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순, 그녀는 나보다 두 살 연하로 1940년생이었다. 인천에서 공사 측량기사를 하다 은퇴 후 농장을 경영하는 부친(김덕준)과 모친(이자금) 사이의 5남매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김정순 그녀는 나보다 2살 연하이고 아버지는 측량기사셨는데 특히 댐을 측량하시던 분이었다.
그는 댐을 측량하여 두께나 넓이 높이 등을 계산하곤 했다. 아내는 몇 년 전 언니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전라도 함평의 아버지가 완공하신 대동댐에 방문하였다. 든든하게 서있는 댐을 보니 아버지의 숨결이 느껴지더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는 귀여움을 받고 자라서인지 유순하고 베풀기를 좋아하는, 인정 많은 심성의 소유자이다. 어렸을 적부터 꿈이 사회사업가였다.
당시 한국은 가난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다. 어린 시절은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가난하게 살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결혼한 언니의 권유로 생각도 하지 않았던 미국에 유학을 오게 되었고 형부가 미주리 쪽에 근무를 했기에 1963년에 CMSC에 입학, 비즈니스를 공부하게 되었다.
“국제학생회에 와서 왜 복잡하게 질문했어요?”
내가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유학생들이 학비도 벌어야 하고 다들 시간적인 여유가 없는데 참석한다면 어떤 도움 될 만한 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해서 질문했어요. 회장님이 한국인인 줄은 몰랐죠.”
대답을 하며 미소를 보였다.
“그때 질문할 때 정말 화가 났어요. 회장이지만 영어가 잘 안 되는 입장이라 무척 난처했거든요.”
“정말요?”
그녀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그리고 나의 첫인상에 대해 물으니 “특별한 것이 없었다”고 말해 조금은 서운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의 감정과는 달리 그녀는 나에 대해 친구 이상의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밝혔다. 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셨던 때의 위로나 연민이 아닌 사랑의 감정이 우리를 연결했다.
그녀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면서 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그녀는 기숙사 카페테리아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나는 야간에 식당에서 일했기에 서로 공부하랴 일하랴 데이트할 시간을 쪼개는 것도 쉽지 않았다.
우리는 틈나는 대로 데이트를 즐겼다. 주말이면 함께 다운타운을 걸으며 쇼핑도 하고, 드라이브 인 영화를 함께 보러 가기도 했다. 내 숙소 맞은편에 위치한 다이어리 퀸(Dairy Queen)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기도 했다.
고달픈 유학생활도 사랑하는 여자가 곁에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고 힘이 났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갑작스레 그녀가 떠나야 하는 일이 생겼다. 야속하게도 그녀는 학교를 1년 반 다닌 후에 위스콘신 주의 밀워키 ΜΙΤ로 전학을 가서 편입했고 디자인 스쿨을 다녀서 그곳에서 디자인 계통의 서머잡을 구했다.
그녀와 보낸 1년 반의 시간은 가슴 떨림의 시간이었다. 이제 막 로맨스가 피어나려는데 그녀가 떠나자 내 삶은 온통 텅 비어버 린 듯 했다. 혼자 남겨진 외로움을 견디기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무작정 중고차를 몰아 밀워키로 달렸다.
낯설고 먼 밀워키로 달리는 길은 생명을 거는 위험한 일이었다. 엔진 과열로 중간에 멈추기도 하고 눈보라가 몰아쳐 앞이 보이지 않는 밤을 위태롭게 달렸다. 공부와 아르바이트로 부족한 수면 때문에 내려 감기는 눈을 억지로 치켜뜨며 프리웨이를 달려야 했다. 먼먼 북미의 낯선 길, 숱하게 위험한 순간도 맞닥뜨렸지만 그녀를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 순수한 사랑과 열정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왕복 10시간이 걸리는 밀워키 길을 주말마다 달렸다. 끝내 진심이 전달되었는지 그녀는 나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훗날 술회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밀워키로 떠날 수밖에 없었어요. 이별하는 마음이 아팠죠. 그런데 뜻밖에도 차를 몰고 밀워키까지 달려오는 당신의 정성을 보고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구나’ 하는 마음을 읽게 되면서 당신에게 기울어졌지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마치 영화 속의 제임스 딘처럼 질주했던 젊은 혈기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서슴없이 그 길을 달릴 것이다.
1965년이 밝은 1월 15일, 드디어 그날이 왔다. 경제과 교수 캐서디(Dr. Casady) 부부가 혼례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다해주셨다. 양가 부모님께는 편지로 결혼 소식을 전해드렸다. 부모님을 모실 수 없는 가난한 유학생의 결혼식이지만 양가로부터 진심 어린 축복의 전보를 받았다.
학교에서 특별히 학교 채플을 결혼식장으로 사용하도록 허락해주었다. 나는 중고 자동차가 마음에 걸렸다. 기온이 떨어지면 영락없이 시동이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만일을 대비해 휘발유를 가득 채우고는 결혼식 전부터 시동을 끄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문제는 시동이 걸린 차를 누군가가 지켜야 하는 문제가 생겼다. 가까운 일본인 친구 티노(Teno)에게 부탁을 하고는 결혼식장으로 들어갔다.
주례는 학교 채플의 밀러 목사님(Rev. Miller)이 맡아주셨다. 교수님들과 국제학생회 소속 학생들을 비롯한 스무 명 정도의 하객이 참석한, 조촐한 결혼식이었지만 모두가 새롭게 인생을 여는 신랑 신부를 축하해 주었다.
신부는 아버님 대신 룸메이트였던 친구 쥬디의 부친인 제이콥 커닝햄(Jacob Cunningham) 회장이 기꺼이 웨딩마치를 위해 손을 이끌어 주셨다. 결혼예물로 나는 신부의 손에 반지를 끼 워 주었다.
결혼식 내내 영하의 추운 날씨임에도 끝까지 시동 켠 차의 보초를 서주었던 일본 친구 티노 외에도 도와준 분들이 많았다. 우리 부부를 특별히 아껴주시던 이웃의 마가렛 할머니(Mrs. Margaret)는 신접살림에 필요한 살림도구를 다 장만해 주셨다. 비록 어려운 여건 속에서 결혼을 했지만 주위 분들이 도와주어 결혼식을 무난히 마칠 수 있었다.
부모님께서 함께 하지 못 해서 한국식 폐백을 드릴 수도 없어서 신부는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우리는 40불짜리 월세로 옮겨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비록 신혼여행을 갈 여유는 없었지만 함께 약속했다.
“열심히 살아서 언젠가는 부모님 계신 고국으로 돌아가서 큰 절도 올리고, 멋진 곳으로 못 간 신혼여행 대신 부부여행을 가기로 합시다."
약속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지켜졌다. 그런 축복이 가능했던 것은 양가 부모님들의 사랑과 은혜라고 늘 생각했다. 앞날을 시작하는 장성한 자녀들이 이국땅에서 영원한 소울메이트(SoulMate)로서 결합하는 결혼식을 지켜볼 수는 없지만 멀리서 기도로 행복하게 살기를 축복해주신 덕분이었다.
나는 낮에는 학교에서, 밤에는 식당에서 일을 했고, 아내는 디자이너로서 취업이 되어 일을 했다. 1966년에 큰아들 재우가 태어났다. 부모님의 사랑이 오늘의 우리를 있게 했다. 부모님의 내리사랑을 가슴에 새기면서 우리 부부는 자녀를 키워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