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그녀에 대한 사랑은 조금씩 커져갔다. 하지만 말할 수도 없었고, 접근할 용기도 없어서 먼발치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한 학년이 지나던 해에 한국으로부터 갑작스럽게 할머님의 부고를 받았다. 당시의 전화는 먼저 ‘몇 월 며칠 몇 시에 전화할 테니 기다려라’는 전보를 보내고는 정한 시간에 전화를 하면 전화교환수가 “기다리라”고 하면, 그때부터 연결될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겨우 연결이 되어도 감이 너무 멀어서 제대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서 “여보세요?”하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치기 일쑤였다.
어렵사리 국제전화로 무사한 목소리를 들었으니 우리 집도 여느 부모님과 말씀이 똑같았다.
“알았다. 건강 신경 쓰고 열심히 해라, 돈 많이 나온다. 끊어라!"
그러니 유학생이 장례식에 참석하러 한국에 가는 것은 생각조차 못할 일이었다. 항공료뿐 아니라 학기 중에 갈 수도 없는 상황이라 불효손자가 되어버린 심정이어서 무척이나 마음이 아팠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할머님은 나의 성경 선생님이셨고, 이야기를 해주는 문학 선생님이셨고, 아버지의 꾸중을 막아주시는 보호막이셨다. 그분에게 받은 사랑을 미처 다 갚지도 못했는데, 머나먼 이국으로 떠나온 사이 다시 뵙지 못할 길로 가셨다. 서쪽의 먼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보며 내 슬픔을 실어 보냈다.
그날 저녁 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녀의 식사 초대는 뜻밖이었다. 비록 상중이었지만 그녀의 따뜻한 배려는 더욱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훗날 그때를 회상하면서 자신을 위로해준 고마움 때문에 할머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보답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서 먼저 식사를 함께 하자는 말을 건넸다고 술회했다. 할머님을 잃은 슬픔은 그녀의 자상한 위로로 봄날 처럼 누그러졌고, 사랑이 꽃처럼 싹트기 시작했다.
며칠 후 측근인 일본인 친구 티노(Teno)로부터 급히 제보전화가 왔다.
“준이 지금 동양인 남자하고 다운타운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걸 보았다.”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졌다. 마치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랄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동양인 남자, 누구?’
괜히 질투심이 생겼다. 그동안 그녀와는 정식으로 데이트조차 할 기회가 없었다. 학생회관에서 커피 한 잔 나누는 정도에서 더 이상의 진척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복병이 나타났다.
‘다운타운으로 데이트를 할 정도의 사이라면······?’
질투심에 의심이 들자, 그녀의 애국심마저 의심이 들기도 했다.
‘하필이면 한국 남자도 아니고 ’
나는 감정을 미처 추스르지도 못한 채 급히 차를 몰고 다운타운으로 달렸다. 두 블록 앞에서 그녀를 발견했다. 그녀는 구둣가게에서 쇼윈도를 한참이나 응시하더니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동양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괜한 걱정을 했나……’
마음 한구석이 약간 안심이 되자 가게 앞에 주차시킨 후 그녀를 기다렸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가게를 나오던 그녀가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녀를 태우고 퍼틀 스프링(Pertle Springs) 숲 호수가(Lion Lake)로 드라이브를 갔다. 너른 저수지를 끼고 굽이진 길을 천천히 따라갔다.
“놀라셨죠?”
“아니, 어떻게 알고서……”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그냥 지나가다가 우연히 가게 들어가는 것을 보아서······”
나는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제야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흔히 말하는 기사도 정신을 발휘했다는 그런 인정을 받는 순간이었다.
저수지 길에는 사람들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고,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지고 있는 가을 늦은 오후, 햇살이 조금씩 기울어 가고 있었다.
나는 차를 세웠다. 그녀는 조금 긴장한 눈치였다. 지금은 그녀에게 분명한 사랑한다는 의사를 전달할 필요가 있었다. 나 말고 다른 남자와의 데이트는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 마음을 전해야 했다.
가슴이 쿵광거렸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너무 부끄러웠는지 손을 살짝 뺐다. 나는 그 순간이 멋쩍어 얼른 라디오를 켰다. 더 플래터스(The Platters)가 부르는 매력적인 노 래 「Smoke gets in your eyes」가 감미롭게 흘러나왔다.
They asked me how I knew my true love was true.
사람들이 묻더군요, 내 참된 사랑이 사실이란 걸 어떻게 아느냐고.
I, of course, replied something here inside cannot be denied.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죠. 내 마음속에 자리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라고.
They said some day you'll find all who love are blind.
사랑에 빠진 사람은 모두 눈먼다는 걸 당신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라고.
When your hearts are on fire, you must realize smoke gets in your eyes.
가슴이 불타오를 때, 그 연기가 당신의 눈을 가린다는 걸 알아차려야 한다고.
그날 그녀를 기숙사에 내려주고는 돌아오는 길에 고백할 기회를 놓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만 돌아오는 길에 나도 모르게 「Smoke gets in your eyes」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내 마음이 미친 듯이 그녀에게로 달려가는 것, 눈이 머는 것, 그것이 사랑임을 그 노래가 분명하게 전해주고 있었다. 나는 행복해지기 시작했고, 낙엽이 지는 것조차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나를 둘러싼 세상이 갑자기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살며시 지나는 미풍도, 떨어지는 낙엽도 내겐 시였고, 그림이었으며 음악이었다.
언젠가는 내 마음을 고백할 날을 고대하며 나는 달빛이 비쳐드는 자취방 침대 에서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사랑합니다!”
고백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영화 속의 장면들을 애써 떠올려 보려다 잠이 들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