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베토벤의 불후의 명곡 5번 교향곡이 「운명」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가 “운명이 이처럼 문을 두드린다” 고 했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도 운명이 문을 두드리듯 그녀가 나타났던 것이다.
학생회관인 유니온(Elliott Union) 건물을 들어서면 푹신한 소파가 놓인 라운지가 있고 커피 등을 먹을 수 있는 스낵바도 위치한 넓은 홀이 있었다. 매월 국제학생회 회의를 주재해온 곳이었다. 그날도 영어 때문에 가능하면 간단하게 회의를 마칠 작정이었다. 그런데 뒤에 앉은 초면의 여학생이 손을 들더니 질문했다.
“국제학생회에 가입을 하면 무슨 도움 되는 점이 있죠?”
첫눈에 한국인은 아닌 것 처 럼 보였다. 눈이 크고 피부가 하얀 모습의 다소 이국적인 마스크도 그렇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당당하게 발언하는 모습이 한국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국 여성들은 무척이나 수줍어하는 편이라 의사발언을 제대로 못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폐회 인사를 하려는데 갑작스런 당돌한 질문에 적이 당황스럽고 은근히 화가 났다. 솔직히 말하자면 영어가 능통하지 못한 시절이라 회의 때 질문을 많이 받는 것이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회장의 입장에서 친절하게 대답할 의무가 있는 터라 불쾌한 내색은 못하고 생각나는 대로 학생회의 계획 등을 얘기했다. 현문우답(賢問愚答)이 된 것 같아 약간 미안한 느낌마저 들었다.
회의를 마치고 나서 통성명을 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예상과는 달리 한국인이었다.
“영어 이름은 준이에요. 한국 이름은 김정순이죠.”
하얀 피부에 큰 눈망울을 지닌 그녀는 이국적인 이목구비를 가졌다. 첫인상은 기품이 있어 도도해 보이기까지 했다.
‘보통 집안의 여자는 아니겠구나. 한국인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한국여성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은 여지없이 깨져 버렸다. 당차고 이지적인 그녀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인사를 나누고 바로 헤어졌지만 그녀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해에 입학한 홍일점, 한국인 여학생이어서 마음이 설레었다. 한인 여학생이 한 명 오자 한국 남학생 세 사람 사이에 말 없는 신경전이 벌어졌다. 서로 간에 경쟁자가 되어버린 분위기였다. 물론 나는 회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두 친구보다 먼저 말을 건네어 선점을 한 둣 보였어도 연애란 누구도 장담 못할 예측불가의 게임이 아닌가.
다들 그 여학생에게 잘 보이려고 최선을 다하는 눈치였다. 나 역시 몇 차례 그녀 방에 전화를 했는데도 연결되지 않아 친해질 계기를 만들어 보려 해도 쉽지 않았다.
리포트 준비하랴, 기말시험 준비하랴, 바쁜 학교생활에서도 그녀를 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만날 방법이 없었다. 전화연락도 되지 않아 여학생 기숙사인 사우스예터 홀(SouthYeater Hall)을 찾아가 보기도 했다. 하지만 중심가(Main St.)에 있는 기숙사 근처에 와서는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근처를 배회하다 다시 쓸쓸히 도서관을 지나서 맥과이어(Maquire) 거리에 있는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마음을 졸이던 어느 날，그녀의 룸메이트인 쥬디(Judy)로 부터 전화가 왔다.
"Hey, Yong, I need your help (영, 도와주었으면 해서)”
쥬디의 목소리는 약간 당황한 톤이었다.
“준이 며칠째 밥도 먹지 않고 누워만 있어. 한국에 계신 아버님께 서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어.”
그 말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마음은 당장이라도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겠지만 당시의 한국 경제 사정이나 여러 여건상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학기 중이어서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57년형 스틱 기어인 중고차 쉐비를 샀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던 그 차를 몰고 그녀의 기숙사로 달려갔다. 그녀에 대한 호감도 물론 있었지만 이역만리 떨어진 고국에서 돌아가신 아버님 장례에 참석도 할 수 없는 처지를 같은 유학생의 입장에서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간 그녀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몰라보게 해쓱해진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고, 눈은 왕방울만큼 부어 퍽이나 가여웠다. 낯선 땅에서 한 민족끼리 통하는 마음이 어쩌면 위로가 될 것 같아 그녀를 식사에 조대했다.
그녀를 위로해주려고 차에 태우고 미리 예약해 둔 로컬 워렌스버그(Warrensburg) 경비행장 내 고급 식당인 스카이 헤븐(Sky Heaven)으로 데려갔다. 고급 식당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스테이크 가격이 3불 80센트라고 적힌 메뉴판을 보고 내심 놀랬다. 휘발유 1갤런이 19센트였던 시절이었다. 돈 계산으로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이내 지워버렸다.
‘슬프고 힘든 상황에 있는 준을 기쁘게 해 줄 일이라면 무엇이든 못하랴?’
나는 마주 앉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수척한 얼굴 위로 식탁에 놓인 촛불이 일렁거리자 우수의 그늘이 짙어 보였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했다. 나름대로 말주변이 있는 편이었고, 대중 연설도 자신이 있었지만 괜지 그녀 앞에서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저…… 어떻게 위로해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갈 수 있는 거리라면 마지막 임종이라도 뵐 수 있었겠지만…… 이렇게 이역만리에 와서…… ”
어렵사리 위로하려고 꺼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고개를 숙여 눈시울을 적신 얼굴을 손수건으로 가렸다. 나는 주위에 앉은 손님들이나 시중드는 웨이터가 이쪽 테이블로 고개를 돌리지나 않을까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고급 식당에 들어온 동양인에 대한 그들의 시선도 그렇지만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애써 울음을 참으려고 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가 조용히 그녀 곁에 놓인 의자로 옮겼다. 고개 숙인 그녀의 머리 위에서 내 손이 잠시 떨린 채 선회했다. 목구멍으로 겨우 침을 넘겼다. 손을 그녀 어깨에 놓아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갈등이 일었다. 겨우 용기를 내어서 살짝 어깨에 손을 대었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나는 지그시 손가락으로 그녀의 흔들리는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러자 그녀는 조금 미안했는지 살며시 일어나서는 “잠시···.··” 하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혹시 실수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녀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주문한 스테이크는 이미 식어 버렸다. 나는 배가 고프지 않았고 그녀 역시 야채스프와 빵을 조금 먹는 것만으로 식사를 마쳤다. 가난한 유학생인 우리는 값비싼 스테이크를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식당을 나왔다. 식욕은 사라졌지만 가슴 가득 어 떤 연민 같은 사랑이 채워졌다. 먹지 않아도 시장하지 않은 건 사랑의 감정이 가슴아 피어올랐기 때문일 터였다. 이미 밤이 깊었다. 가로등이 캠퍼스를 고즈넉이 비추었다. 나는 그녀를 기숙사까지 바래다주고 숙소로 돌아왔다. 헤어지는 순간이 그리도 쉬울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그녀 생각에 잠이 오질 않았다. 창밖으로 고개 숙인 가로등 속에 먼 고향이 보이면서 아버님을 여윈 그녀를 떠올렸다. 그러자 고향에 계신 부모님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녀와의 첫 번째 데이트였다. 데이트라면 데이트라고 할 수 있겠지만, 위로의 의미가 더 짙은 만남이었다.
이성 간의 느낌보다는 같은 민족으로서 이역만리에서 아버지를 여왼 동창생이라 여동생 같은 가족의 느낌이 더 강했다.
훗날 아내는 그때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큰 위로를 받았다며 그 일이 있은 후 나에게 더 호감을 가지게 되었노라고 넌지시 고백했다.
